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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재미있게, 더 아름답게, 더 야하게!

 로운 애니메이션들이 시작할 시즌이 되면, 관련 게시판에서는 그에 대한 사전 정보를 공유하려는 글들을 굉장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단순히 어떠한 작품이 시작할 것인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에서부터 어떤 제작사의 작품이 공개되는지에 대한 관심까지 다양한 높낮이의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런 가운데,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만드는 또 하나의 공로자인 성우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지대해졌다는 것은 분명히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사실이다. 굳이 유명 성우의 광적인 '빠'를 자처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성우가 등장하는지에 따라서 작품 자체를 고르게 되는 현상은 이제는 별로 특이하게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을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유명한 배우의 이름값만을 놓고 장사를 하려는 모습들도 보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내용물(혹은 연기)이 좋지 못했을 경우까지 이름값만으로 커버할 만큼 한국인들의 문화 소비의식은 낮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배우가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되며, 그것은 조금 더 스케일이 큰 해외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똑같은 러브 코미디물을 낸다고 했을 때, 와타세 소이치로의 작품보다는 유우키 린의 작품을 기대하게 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내가 항상 이야기하는 '이름값'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떠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생산적인, 그리고 의미가 있으면서도 너무나 간단하여 금방 잊게 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 발상이 된 것이 아름답고 야한 이야기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약간 재미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소노오 메이 양이 연기한 캐릭터, 유우키 나나미>


 
 마 전 Nomad 사의 작품인 <林間島>를 플레이하면서 새삼스럽게 놀란 일이 있었다. 모 단어와의 말장난을 통해 타이틀을 붙인 과격한 18금 게임이라서가 아니라, 히로인의 성우를 담당한 미소노오 메이의 놀라운 연기력 때문이었다. '갓츄미리'를 통해 아실 분들은 아실 나름 유명한 그녀의 성장한 모습(?)에 대해서는 지난 번에도 포스팅을 남겼었지만, 그로부터 약 1년 뒤에 플레이 한 게임에서도 다시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녀의 연기는 굉장히 야했기 때문이다.

 소년 만화의 주인공은 불타오르는 열정이 있어야 제맛이고 소녀 만화의 주인공은 아름다운 꿈을 꾸어야 행복한 것처럼, 과격한 18금 게임의 히로인은 당연히 야해야 하는 것이 지당한 이치다. 그 누구도 UFC무대에서 브록 레스너가 열 다섯살이나 많은 랜디 커투어를 때려눕힌다고 예의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에로 게임의 히로인을 맡은 성우가 굉장히 야한 연기를 잘 한다는 것은 분명히 칭찬을 받아야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쓸데없이 하는 것은, 그것을 못 한 성우도 굉장히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과거 스튜디오 EGO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무렵, 작품마다 겹치기 출연이 많았던 때, 굉장히 마음에 드는 캐릭터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비호감적인 연기력을 지닌 성우의 배정으로 인해 좋아할 수 없었던 일이 있었다. 물론 그녀는 조연 캐릭터였기 때문에 공략도 불가능했지만, 작품 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그런 식으로 망가졌다는(?) 사실은 굉장히 짜증이 날 만한 일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Riddle soft의 게임을 플레이 하면서도 더욱 심각하게 느낄 수 있었다. 쿨한 성격의 캐릭터라는 것을 이유로 거의 책 읽는 수준의 발연기를 하는 성우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정말 화가 날 지경이었고, 더 짜증이 나는 것은 그 성우가 같은 회사의 다음 작품에서도 출연했다는 것이었다. 

 성인용 미소녀 어드벤처 게임에 대해서 즐기기 시작하면 어느 정도씩은 성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물론 마음에 든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 분이 연기한 다른 작품이 없는지에 대한 흥미로 시작을 하지만, 점점 많은 것을 알아가면서 태도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지간해서는 베테랑들이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모를라야 모를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잘 모르다가, 조금 알게 되면서 유명 성우들이 너무 많은 작품들에 겹치기 출연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불만을 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굉장히 높은 중복률이 지겹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조금 더 알아가다 보면 호오를 떠나서 불만은 사그라든다. 왜냐하면 그들의 연기는 그만큼 아름답고, 또 야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똑같은 캐릭터라도 어떤 성우가 연기하는가에 대한 요소는 미연시 게임의 선택에 있어서 굉장한 영향을 미친다. 아무리 그림이 예쁘고 설정이 마음에 드는 캐릭터라도, 성우가 혼을 불어넣지 못하면 예쁘지도 않고 야하지도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목소리만 예쁘고 야하다고 될 일이 아니라, 충분한 캐릭터의 이해와 연기력이 받쳐줘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로의 사역마, 작안의 샤나 등의 작품들이 인기를 끈 이후, 쿠기미야 리에 씨가 츤데레 계의 우상이 되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가 수많은 작품들의 츤데레 캐릭터를 연기하다보니, 위에서 나온 이야기와 비슷하게 지겹다거나 하는 불만도 분명히 찾아볼 수 있었다(또 쿠기미야 리에냐? 라는 식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비판을 하는 사람들조차 그녀가 츤데레 연기계의 no.1 이라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당연히 그녀의 츤데레 연기가 훌륭하기 때문이고, 다른 성우들이 하는 것과는 다른 분명한 매력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자와 카나는 사실 <제가페인>에서 히로인 역할을 맡으면서 연기력 때문에 많은 비난을 샀던 성우이다. 그러나 당시 군대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접했던 나는 전혀 생각도 못 했을만큼 - 그녀가 욕을 먹는다는 것에 대해서 -, 그녀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매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얼마 전에 한 동호회의 게시판에서 신작 애니메이션 성우 관련 정보란을 보며, 하나자와 카나의 등장이 결정된 리스트에 대해 '역시 하나자와 카나 양은 요즘 잘 빠지지 않네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 댓글을 읽었다. 그녀가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녀의 목소리와 연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그런 매력을 발견한 시청자들이 늘어났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가요계에서는 가끔씩 노래도 못 부르는 실력파 아이돌이 얼굴 & 몸빨로 두터운 팬덤을 형성하는 경우가 있는 모양인데, 성우계에서는 그러한 일이 극히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 혹은 그녀가 인기를 얻는 이유 중 가장 첫 번째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히 '뛰어난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케다 슈이치 씨가 단 하나의 목소리만 내면서도 전설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없는 샤아와 세이쥬로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단골처럼 등장하는 베테랑 성우들은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해당 캐릭터를 연기하며, 또 그 매력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인기를 이어갈 수 있다.



 핏 보면 전혀 도서 밸리에 어울리지 않는 글처럼 굉장히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부터가 본론이지만 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무슨 당연한 얘기를 하려고 하나'에 대해서 눈치를 챈 분도 많으실 것이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작가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설정의 미소녀들의 등장이 부각되는 아이언하트와, 트렌드를 잘 반영하고 있는 카니스 디루스>



 요즈음 출간되는 한국의 라이트노벨을 보면 일본의 그것에 견주어도 부럽지 않을만큼 다양한 유형의 캐릭터와 재미난 설정들이 등장한다. 로리니 누님이니 하는 고리타분한 구분 방법을 제하고서라도, 시대의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는 뒤쳐지지 않는 캐릭터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으면서도 맹한 미소녀도 있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 전파계 미소녀도 있으며, 억척스러운 개척자 타입의 털털한 미녀도 있고 어리고 귀엽지만 가시가 있는 소녀도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무엇일까? 이 글을 쓰면서도 그녀들의 이름을 잘 기억해 낼 수 없는 것은 단순히 내 기억력이 부족해서일까?

 위에서도 작가 드립을 했지만, 그것은 웃자고 한 이야기가 아니다. 서사물을 잘 그리는 작가는 사건의 흐름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에 능숙하며 러브 코미디를 잘 그리는 작가는 소소한 심리 묘사와 대화문을 멋지게 해 내며, 미스터리를 잘 그리는 작가는 머리가 좋고(?) 이능 배틀물을 잘 그리는 작가는 뛰어난 묘사 실력을 갖추고 있다. 아무리 이능 배틀물을 잘 그리는 작가라 하여도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면 헤맬 수 있다는 이야기다(물론 모든 것을 다 잘 해내는 특출난 작가들을 제외하면).

 마찬가지 이야기다. 아무리 살색의 비율이 높고 에로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명 에로게임 원화가의 매력적인 캐릭터라도 어떠한 성우가 연기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매력이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트렌드에 맞는 설정의 캐릭터가 등장하고 그녀들을 골라 잡을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그려내는 작가의 역량에 따라 마음 속에 남는 존재가 될 것인지 혹은 양산형 캐릭터가 될 것인지는 달라질 수 있다.

 무조건적인 스테이터스는 아니겠지만, '작가의 필력'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APM이 높다고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도 분명 우월한 피지컬은 여러가지 전략을 짜는 데 있어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좋은 문장을 쓸 수 있다고 좋은 글이 되는 것은 아니라도 그것을 어떻게 살리느냐에 따라서 당연히 더 나은 필력을 지닌 작가가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러한 필력이 어떠한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바이오닉 컨트롤이 굉장히 뛰어나지만 끝내 그것만으로는 프로토스전의 약점을 극복할 수 없었던 모 우승자 테란의 예처럼, 아무리 필력이 뛰어나더라도 그것을 잘못된 컨셉과 방향으로 펼쳐 나간다면 사이오닉 스톰이 충전된 하이템플러 앞에 다가서는 마린메딕 부대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상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라이트노벨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구상을 했어도, 작가가 그것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지금까지 많이 등장했던 한국의 라이트노벨들은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시키는 것'은 성공했을지 몰라도,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그려내는 것'에는 실패했기 때문에 현실과 같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매력적인 캐릭터를 탄생시켰다고 해서 '좋아, 이걸로 가자!'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어떤 캐릭터를 가장 매력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지에 맞추어 글을 쓰는 것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아 컨셉을 잡고 가야 하는 거라면, 좀 힘든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 내 생각이다. 그만큼 '어디서 본 것 같고, 어디서 만난 것 같은' 캐릭터들만이 판을 치는 것이 지금 상황이니까. 

 

by Laphyr | 2010/02/13 00:54 | = 라이트노벨 | 트랙백 | 덧글(11)

라이트노벨 속, 말투와 캐릭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수단이 굉장히 부족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대사나 표정, 심지어는 얼굴색이나 호흡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단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죠. 라이트노벨의 경우 일러스트의 힘이 굉장히 큰 도움을 줍니다만,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면 그것이 주가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결국 독자가 캐릭터를 만나고,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일러스트 페이지가 아니라 텍스트 페이지니까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대사'일 것입니다. 외모나 행동거지의 묘사도 충분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 되지만,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캐릭터의 이미지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대사를 따라오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의외로 순수문학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며, 대화의 비중이 높은 대중문학이나 장르문학에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죠. 라이트노벨도 비슷한 맥락에 자리하여, 대사는 말투라는 형태로 구체화 되어 캐릭터를 구성하는 굉장히 중요한 재료가 되고 있습니다. 


 "벼,별로 네가 걱정되는 것은 아니니까! 차,착각하지 마!"


 ...로 대변되는 츤데레 말투를 비롯해, 정형화된 말투 - 누님 말투, 동일어미고수 말투, 보이쉬 말투 등 - 들은 이미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잡아, 해당 말투가 등장하기만 해도 캐릭터의 성격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에 이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어에 해당되는 이야기로, 예를 들어 동일어미고수 말투의 경우 미묘한 어미의 차이를 번역하면서 그대로 살려낸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원서와 번역서를 번갈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이런 부분에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식상하기 그지없던 말투가 매력적인 한국어로 번역되는 것에서 오는 쾌감이라고나 할까요?




 "당신, 정말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바로 <늑대와 향신료> 에 등장하는 호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래 묵은 신령인 호로는 실제로 고풍스러운 말투를 사용하고 있는데, 한국 정발판에서는 그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죠. 그녀의 2인칭인 'ぬし'는 분명히 '당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말투와 묘한 뉘앙스로 인해서 보다 친숙하게 느껴지는 호로가 재탄생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투를 억지로 번역하여 살려내려 했다면, 과연 지금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이런 말을 하면 꼭 "나는 무조건 원판이 더 좋아요 뿌우 -3-" 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확신은 안 하는게 낫겠군요. 임자, 이리로 와보랑께~ 와 같은 말투를 쓰는 호로는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하겠습니다.) 

 비슷한 예로는 <렌탈 마법사>의 호나미 다카세 엠블러를 들 수 있습니다. 아이스 블루 빛깔의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영국의 전통마법을 익힌 숙련된 마녀로 등장, 소꿉친구인 이츠키를 좋아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를 취하며 차가워보이는 여자아이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근데 그녀는 관서 사투리를 쓰죠. 상대적으로 표준어를 써야 세련된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한 우리나라의 정서를 감안했을 때, 그녀의 말투를 정발판에서 사투리 - 주로 관서 사투리라면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으니 - 로 번역했다면 '차가운 마녀의 이미지'는 많이 죽어버렸을 겁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Room no.1301>에 등장하는, 존재감 없는 투명라인 여자친구 오오우미 치야코와 주인공 키누가와 켄이치의 관계이지요. 정발판만을 보면 이 둘의 대화가 어째서 겉도는지 잘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습니다. 다른 여성들과 관계를 맺고 다니는 켄이치의 성향을 제하더라도, 그냥 평범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이 어째서 저렇게 서로를 멀리만 느끼고 있는지 의아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요. 실제로 저는 그랬습니다. '얘네들이 어째서 가까워지지 않는지?' 가 너무나 궁금했죠.

 일본에서는 친구 사이에서도 존대말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말도 안 되는 감각이지만, 그네들 입장에서는 처음 같은 반이 된 친구에게 다짜고짜 이름을 부르며, "너, 어디 살아?" 라고 말을 거는 것이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죠. 오오우미와 키누가와는 서로를 성 + さんor 君 으로 부르며, 심지어 남자인 켄이치마저 치야코에게 존대말을 씁니다. 사귀기 시작한 두 사람임을 가정하면 약간 어색할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과거 관계(클래스 메이트)를 감안한다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은 아니죠. 그렇지만 이것을 한국어로 직역한다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됩니다.
 
 어쩔 수 없는 문화적 차이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이 부분은 '연애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는' 켄이치의 감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제대로 살아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치야코와 대화하는 것은 멀쩡해 보이는데, 어째서 이런 공허한 생각만을 하는 것일까- 라는 의아함이 생겼기 때문이죠. 실제로 이 의아함은 이후 켄이치의 종마 행적과 맞물려, '아, 이 녀석은 관계가 없으면 직접적으로 인식을 못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까지 해 버리고 말았으니.


 

 다음은 굉장히 개인적인 예로, 제가 금서목록에 더 이상 돈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준 츠치미카도 군입니다. 원래 금서목록은 여러가지 면모로 까면서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접을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습니다. 츠치미카도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있어 보이기도 하고, 뒤가 구리면서도 주인공의 근처에 있는 것이 마치 예전의 제로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듯한 부분이 있었죠. 근데 문제는 말투였습니다. 원서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정발판의 어미 번역은 도저히 취향상 더 읽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더군요. 초반에 이 녀석이 비중이 별로 없었을 때는 그냥 스킵하고 읽었습니다만, 9권~10권 즈음이 되자 그럴 수 없게 되어서 결국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번역을 까는 것은 아니고, 그야말로 취향 문제죠. 그런 닭살이 돋는 캐릭터는 보고 있을 수가 없더군요. 

 (물론 말투 뿐만은 아닙니다. 이렇게 비 남성적인 모습으로 실실대다가 사실은 강했다! 라는 캐릭터는 짜증이 나더라구요. 귀엽다가 잔인한 제로스, 털털하다가 비장했던 쿠거 형님도 비슷하게 혼네를 숨기고 있는 케이스지만 호감이었던 것과는 다르죠. 거기다 성우까지 스즈켄 크리..)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고 싶도록 만들어준 장본인 캐릭터는 <뻥쟁이 미군과 고장난 마짱>의 나가세 토오루 양입니다. 뭐 그녀의 말투에 대한 번역 문제는 너무나 많은 분들이 언급을 했기 때문에, 새삼 그걸로 까거나 옹호할(??) 생각은 없고요. 단순히 나가세 토오루라는 캐릭터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겠지요. 그녀가 평범하지 않은 가벼운 말투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고, 1:1 대응이 될 리가 없는 번역이 어려웠던 것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경우, 고풍스러운 말투를 옮기지 않은 호로 & 사투리가 표준말로 바뀐 호나미의 긍정적인 면모를 본다면, 나가세 토오루는 잃은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첫째, 완전히 미친 현재의 여친과는 차별되는, 가볍지만 때로는 깊이있는 모습의 갭 모에의 가능성을 완전히 잃어버렸죠. 둘째, 정상적인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작품에서 차지할 수 있는 2권 메인 캐릭터의 자리도 굳히지 못했습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짱에 버금가는 또라이 캐릭터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결말의 반전(..이랄까, 폭로?)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의 낙차가 줄어들었다는 부분입니다. 정상적인 남자가 '나 실은 게이야' 라고 하는 것이, 립스틱 짙게 바르고 가발을 쓴 남자의 같은 발언보다 파괴력이 크다는 것과 같은 이치. 캐릭터 하나만 버려 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전체의 재미도 반감시키는 아쉬운 결과를 불러온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저는 새삼스레 누굴 깔 생각으로 이 글을 적는 것이 아닙니다. 정발판에는 오히려 원서보다 매력이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그와 반대인 경우도 존재하겠지요. 원서를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는 걸로 까려면, 앞에서 예시로 들었던 작품들도 그냥 까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 작업을 하는 분들은 언어적 차원에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작품 내적인 부분에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by Laphyr | 2009/05/06 21:23 | = 라이트노벨 | 트랙백 | 핑백(1) | 덧글(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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