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04일
읽으면서 불타오르는 책, 보고 또 보고 싶은 책
절찬 개봉중인 <트랜스포머2>를 비롯,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했던 많은 영화들이 '보고 또 보는' 관객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굉장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왕의 남자> 같은 경우는 4,5번을 본 분들도 흔했고, 이렇게 말하는 저도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을 극장에서 3번 본 기억이 있기도 하고요. 스타크래프트에도 수년이 지나도 언급이 되거나 기억이 나는 경기가 존재합니다. 질레트 스타리그 4강 최연성 vs 박성준, 에버컵 프로리그 결승 박정석 vs 이창훈 (더블레어), 다음 스타리그 3,4위전 송병구 vs 이영호 (캐리어 300킬) 등은 현재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회자될 경기들이죠.
짧은 러닝타임 속에 다양한 요소를 포함시켜야 하는 영화나 짧은 경기시간 속에 여러 드라마틱한 상황이 발생하는 게임(물론 E스포츠 외의 경기도 포함)의 경우, 대체로 '즐기면서 불타오르는' 경우와 '보고 또 보고 싶은' 경우가 일치할 확률이 높습니다. 재밌는 영화를 또 보고 싶고, 멋진 플레이가 나오는 경기를 다시 보고 싶은 것은 당연하겠죠. 물론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다시 보고 싶다는 경우 - 아름다운 멜로 영화 or 홍진호의 735일만의 승리 등 - 도 있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비율이 적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라이트노벨은 어떠할까요? 저는 이 주제로 스스로의 독서 경험을 돌이켜보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영화나 게임 등의 반복 감상에 대해서는 지극히 대중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제가, 라이트노벨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읽으면서 불타오르는 책' 과 '보고 또 보고 싶은 책'이 달랐다는 겁니다.
1. 읽으면서 불타오르는 책
제 블로그 스킨이나 메뉴를 보시면 짐작하실 수 있는 것처럼, 저는 성우 히라노 아야를 좋아합니다. 갑자기 웬 고백?! 이 아니라, 그만큼 어떠한 상징적인 캐릭터 - 특히 여성이겠죠 - 를 좋아함에 있어서 소위 '누구누구 모에' 라고 표현하는 형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라노베를 읽으면서 순문학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잣대로 평가하지도 않고, 솔직하게 강점, 즉 캐릭터 부분에 대한 포인트에 매혹되면서(?) 감상하는 평범한 독자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읽으면서 불타오르는 책 = 매력적인 히로인이 등장하는 책 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책의 내용은 둘째치고서라도, 일단 여성 캐릭터가 굉장히 마음에 든다면 (+일러스트) 다음 권을 사고 싶은 욕망도 굉장히 올라가게 되죠. 읽으면서 그 캐릭터의 행동 혹은 대사에 주목하고, 주로 그와 그녀가 풀어나가게 될 뒷이야기를 궁금해 하면서 이런저런 상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한 남들에게 그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공감대를 형성,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도 있겠지요. 꼭 해당 캐릭터의 관련 goods를 모두 구매하지 않더라도, 꼭 "나의 누구누구 쨩 하악하악" 이러지 않더라도, '불타오를' 방법은 굉장히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굉장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 평론가가 라노베를 읽는다거나 꽉 막힌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뭔가 내용이 있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 취급을 하는 독자 (=라노베를 싫어하는 사람)가 아니라면, 대체로 어느 정도는 '불타오르는 책' 에 대한 이러한 현상을 갖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2. 보고 또 보고 싶은 책
그러나 보고 또 보고 싶은 책은 오히려 읽을 당시에 불타오르지는 않았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라노베로서 캐릭터의 매력도 어느 정도는 기본적으로 구비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요소가 더욱 재미있는 경우였죠. 카도노 코우헤이 씨의 작품들을 비롯해 <음양의 도시>, <키노의 여행>, <하루히 시리즈> 등의 타이틀은 '가끔씩 잊어버릴만 할 때 꺼내어 읽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1)에서는 '매력적인 캐릭터' 혹은 '상상하던 시츄에이션' 이라는 요소에 힘을 잔뜩 실은 모습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것에 비해서, (2)에 해당하는 작품들은 다양한 소재들을 선보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어떤 방향이든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기팝 이후 어느 정도 라노베의 정형화가 이루어지고 나서부터는 메타픽션적 성격을 갖춘 작품이 소위 '대작', '개념작' 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더더욱 (1)과 (2)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나 싶고요.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겉멋만 잔뜩 든 작풍도 심심찮게 등장하게 되었다는 결과도 있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여기서 평소 라노베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독서를 즐기시는 분이라면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런 작품을 원한다면 왜 굳이 라노베여야 하는가?" 라는 것으로, 아주 간단히 생각해 보아도 '생각을 하게 만드는' 애매모호한 소설들은 순문학 혹은 다른 장르문학에 훨씬 많으므로 상황적으로는 타당한 질문이 될 수 있겠죠.
그러나 결국 이건 라노베 독자가 아닌 사람의 질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굳이 라노베여야 하는가? 라노베를 좋아하기 때문에 다양하게 머리를 굴리면서 즐거운 독서를 위해 궁리하는 사람에게 이건 정말 우문에 불과하죠. 비유하자면 축구경기에서 공을 정확히 받기 위해 손을 쓰면 안 되냐는 조언이나, 2해처리 레어 뮤탈을 막기 위해 고심하는 테란 플레이어에게 2아칸 질템 빌드를 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에게 맞는 라노베, 재밌는 라노베를 찾기 위해서 궁리하는데 다른 소설 얘기가 왜 나오냐는 겁니다.
어쨌거나 본문으로 돌아와서. 확실히 (2)에 속하는 성격만을 가진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상업성이 떨어지는 것은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긴 합니다. 때문에 취향에 맞는 작품을 찾기가 쉽지는 않죠. 특히 잘 팔리지 않으면 정발이 어려울 수 있는 국내 라노베 시장의 현실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크레이지 캥거루 시리즈, 마법사에게 소중한 것 등을 생각하면 -_-;). 결국 '대작'으로 불리는 타이틀들은 기본적으로 (2)의 구조를 갖추고 있으면서 (1)의 요소도 충족시킬 수 있는 작품의 형태가 되는 것이 가장 정형적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위에서 언급한 <부기팝>,<하루히> 시리즈가 그러할 것이고, <풀 메탈 패닉!>,<늑대와 향신료>,<문학소녀 시리즈> 등도 해당되겠죠. 물론 판매량 면에서는 이러한 작품들에 필적하거나 앞서는 많은 타이틀이 있겠지만, 그 중에는 분명히 (1)을 극대화시켜 얻어낸 성과인 경우도 많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언급한 작품 이외의 타이틀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만한 대표적인 케이스를 예로 든 것이지만요.
근데 (2)를 극대화시켜 얻어낸 작품이, 상업성은 그야말로 꽝이지만, 은근히 계속 꺼내어 읽어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는 것이 재미있어요. 이건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누구누구 모에~' 류의 작품은 다른 작품에서 더욱 매력적인 비슷한 히로인을 발견할 경우 타격을 입을 공산이 있거든요. 요즘처럼 캐릭터가 겹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아무리 작가가 개성적인 히로인을 만들었다고 해도, 어지간히 많은 작품을 접해오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 누구랑 누구를 합쳤군' 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신작을 봐도 그 모양인데, 그 작품을 또 보고 싶다....? 이건 <토라도라>와 같이 캐릭터성 이외의 재미도 충분히 구비하고 있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현상이 아닐까 - 싶은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반면에 (2)의 경우는 조금 허용 범위가 넓습니다. 물론 '라노베'의 범주 하에서, 여러가지 실험적인 요소들을 섞어서 만들어 낸 다양한 작품들이 존재할 수 있거든요.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현실 비판 & 반영은 물론, 심지어 요즘에는 라노베 자체를 까는(?) 성격의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고요. 범위가 넓은 만큼 작가가 머리를 굴릴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분만큼 당연히 독자도 생각을 하며 글을 읽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뭐 이것은 분명 장점으로 보이긴 합니다만, 어떻게 보면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합니다. 츤데레 아가씨 캐릭터는 여기저기 예의처럼 등장해도 아주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2)의 영역에서 준비한 이야기가 어디선가 사용된 매듭이었을 경우에 안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상업적인 부분을 포기한 마당에 '개념작' 소리는 커녕 '베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쓸 큰 위험성이 있으니까요..
라이트노벨을 즐겨보는 다른 분들에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 번 여쭈어 보고 싶어집니다. (1) : 읽으면서 불타오르는(모에 입니다 열혈이 아니라) 책, (2) : 보고 또 보고 싶은 책이 과연 얼마나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는지. 실제로 두 번 이상 읽은 작품이 있다면 대체로 어떤 작품군인지. 저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기는 합니다만, 과연 이것이 일반론이 될 수 있을지 애매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 글의 논조도 어느 정도는 바꿀 수밖에 없었는데요, 다른 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굉장히 궁금하네요.
짧은 러닝타임 속에 다양한 요소를 포함시켜야 하는 영화나 짧은 경기시간 속에 여러 드라마틱한 상황이 발생하는 게임(물론 E스포츠 외의 경기도 포함)의 경우, 대체로 '즐기면서 불타오르는' 경우와 '보고 또 보고 싶은' 경우가 일치할 확률이 높습니다. 재밌는 영화를 또 보고 싶고, 멋진 플레이가 나오는 경기를 다시 보고 싶은 것은 당연하겠죠. 물론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다시 보고 싶다는 경우 - 아름다운 멜로 영화 or 홍진호의 735일만의 승리 등 - 도 있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비율이 적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라이트노벨은 어떠할까요? 저는 이 주제로 스스로의 독서 경험을 돌이켜보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영화나 게임 등의 반복 감상에 대해서는 지극히 대중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제가, 라이트노벨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읽으면서 불타오르는 책' 과 '보고 또 보고 싶은 책'이 달랐다는 겁니다.
1. 읽으면서 불타오르는 책
제 블로그 스킨이나 메뉴를 보시면 짐작하실 수 있는 것처럼, 저는 성우 히라노 아야를 좋아합니다. 갑자기 웬 고백?! 이 아니라, 그만큼 어떠한 상징적인 캐릭터 - 특히 여성이겠죠 - 를 좋아함에 있어서 소위 '누구누구 모에' 라고 표현하는 형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라노베를 읽으면서 순문학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잣대로 평가하지도 않고, 솔직하게 강점, 즉 캐릭터 부분에 대한 포인트에 매혹되면서(?) 감상하는 평범한 독자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읽으면서 불타오르는 책 = 매력적인 히로인이 등장하는 책 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책의 내용은 둘째치고서라도, 일단 여성 캐릭터가 굉장히 마음에 든다면 (+일러스트) 다음 권을 사고 싶은 욕망도 굉장히 올라가게 되죠. 읽으면서 그 캐릭터의 행동 혹은 대사에 주목하고, 주로 그와 그녀가 풀어나가게 될 뒷이야기를 궁금해 하면서 이런저런 상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한 남들에게 그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공감대를 형성,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도 있겠지요. 꼭 해당 캐릭터의 관련 goods를 모두 구매하지 않더라도, 꼭 "나의 누구누구 쨩 하악하악" 이러지 않더라도, '불타오를' 방법은 굉장히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굉장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 평론가가 라노베를 읽는다거나 꽉 막힌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뭔가 내용이 있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 취급을 하는 독자 (=라노베를 싫어하는 사람)가 아니라면, 대체로 어느 정도는 '불타오르는 책' 에 대한 이러한 현상을 갖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2. 보고 또 보고 싶은 책
그러나 보고 또 보고 싶은 책은 오히려 읽을 당시에 불타오르지는 않았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라노베로서 캐릭터의 매력도 어느 정도는 기본적으로 구비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요소가 더욱 재미있는 경우였죠. 카도노 코우헤이 씨의 작품들을 비롯해 <음양의 도시>, <키노의 여행>, <하루히 시리즈> 등의 타이틀은 '가끔씩 잊어버릴만 할 때 꺼내어 읽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1)에서는 '매력적인 캐릭터' 혹은 '상상하던 시츄에이션' 이라는 요소에 힘을 잔뜩 실은 모습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것에 비해서, (2)에 해당하는 작품들은 다양한 소재들을 선보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어떤 방향이든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기팝 이후 어느 정도 라노베의 정형화가 이루어지고 나서부터는 메타픽션적 성격을 갖춘 작품이 소위 '대작', '개념작' 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더더욱 (1)과 (2)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나 싶고요.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겉멋만 잔뜩 든 작풍도 심심찮게 등장하게 되었다는 결과도 있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여기서 평소 라노베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독서를 즐기시는 분이라면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런 작품을 원한다면 왜 굳이 라노베여야 하는가?" 라는 것으로, 아주 간단히 생각해 보아도 '생각을 하게 만드는' 애매모호한 소설들은 순문학 혹은 다른 장르문학에 훨씬 많으므로 상황적으로는 타당한 질문이 될 수 있겠죠.
그러나 결국 이건 라노베 독자가 아닌 사람의 질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굳이 라노베여야 하는가? 라노베를 좋아하기 때문에 다양하게 머리를 굴리면서 즐거운 독서를 위해 궁리하는 사람에게 이건 정말 우문에 불과하죠. 비유하자면 축구경기에서 공을 정확히 받기 위해 손을 쓰면 안 되냐는 조언이나, 2해처리 레어 뮤탈을 막기 위해 고심하는 테란 플레이어에게 2아칸 질템 빌드를 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에게 맞는 라노베, 재밌는 라노베를 찾기 위해서 궁리하는데 다른 소설 얘기가 왜 나오냐는 겁니다.
어쨌거나 본문으로 돌아와서. 확실히 (2)에 속하는 성격만을 가진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상업성이 떨어지는 것은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긴 합니다. 때문에 취향에 맞는 작품을 찾기가 쉽지는 않죠. 특히 잘 팔리지 않으면 정발이 어려울 수 있는 국내 라노베 시장의 현실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크레이지 캥거루 시리즈, 마법사에게 소중한 것 등을 생각하면 -_-;). 결국 '대작'으로 불리는 타이틀들은 기본적으로 (2)의 구조를 갖추고 있으면서 (1)의 요소도 충족시킬 수 있는 작품의 형태가 되는 것이 가장 정형적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위에서 언급한 <부기팝>,<하루히> 시리즈가 그러할 것이고, <풀 메탈 패닉!>,<늑대와 향신료>,<문학소녀 시리즈> 등도 해당되겠죠. 물론 판매량 면에서는 이러한 작품들에 필적하거나 앞서는 많은 타이틀이 있겠지만, 그 중에는 분명히 (1)을 극대화시켜 얻어낸 성과인 경우도 많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언급한 작품 이외의 타이틀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만한 대표적인 케이스를 예로 든 것이지만요.
근데 (2)를 극대화시켜 얻어낸 작품이, 상업성은 그야말로 꽝이지만, 은근히 계속 꺼내어 읽어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는 것이 재미있어요. 이건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누구누구 모에~' 류의 작품은 다른 작품에서 더욱 매력적인 비슷한 히로인을 발견할 경우 타격을 입을 공산이 있거든요. 요즘처럼 캐릭터가 겹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아무리 작가가 개성적인 히로인을 만들었다고 해도, 어지간히 많은 작품을 접해오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 누구랑 누구를 합쳤군' 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신작을 봐도 그 모양인데, 그 작품을 또 보고 싶다....? 이건 <토라도라>와 같이 캐릭터성 이외의 재미도 충분히 구비하고 있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현상이 아닐까 - 싶은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반면에 (2)의 경우는 조금 허용 범위가 넓습니다. 물론 '라노베'의 범주 하에서, 여러가지 실험적인 요소들을 섞어서 만들어 낸 다양한 작품들이 존재할 수 있거든요.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현실 비판 & 반영은 물론, 심지어 요즘에는 라노베 자체를 까는(?) 성격의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고요. 범위가 넓은 만큼 작가가 머리를 굴릴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분만큼 당연히 독자도 생각을 하며 글을 읽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뭐 이것은 분명 장점으로 보이긴 합니다만, 어떻게 보면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합니다. 츤데레 아가씨 캐릭터는 여기저기 예의처럼 등장해도 아주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2)의 영역에서 준비한 이야기가 어디선가 사용된 매듭이었을 경우에 안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상업적인 부분을 포기한 마당에 '개념작' 소리는 커녕 '베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쓸 큰 위험성이 있으니까요..
라이트노벨을 즐겨보는 다른 분들에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 번 여쭈어 보고 싶어집니다. (1) : 읽으면서 불타오르는(모에 입니다 열혈이 아니라) 책, (2) : 보고 또 보고 싶은 책이 과연 얼마나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는지. 실제로 두 번 이상 읽은 작품이 있다면 대체로 어떤 작품군인지. 저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기는 합니다만, 과연 이것이 일반론이 될 수 있을지 애매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 글의 논조도 어느 정도는 바꿀 수밖에 없었는데요, 다른 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굉장히 궁금하네요.
# by | 2009/07/04 03:24 | = 라이트노벨 | 트랙백 | 덧글(18)
2009년 05월 06일
라이트노벨 속, 말투와 캐릭터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수단이 굉장히 부족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대사나 표정, 심지어는 얼굴색이나 호흡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단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죠. 라이트노벨의 경우 일러스트의 힘이 굉장히 큰 도움을 줍니다만,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면 그것이 주가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결국 독자가 캐릭터를 만나고,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일러스트 페이지가 아니라 텍스트 페이지니까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대사'일 것입니다. 외모나 행동거지의 묘사도 충분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 되지만,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캐릭터의 이미지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대사를 따라오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의외로 순수문학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며, 대화의 비중이 높은 대중문학이나 장르문학에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죠. 라이트노벨도 비슷한 맥락에 자리하여, 대사는 말투라는 형태로 구체화 되어 캐릭터를 구성하는 굉장히 중요한 재료가 되고 있습니다.
"벼,별로 네가 걱정되는 것은 아니니까! 차,착각하지 마!"
...로 대변되는 츤데레 말투를 비롯해, 정형화된 말투 - 누님 말투, 동일어미고수 말투, 보이쉬 말투 등 - 들은 이미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잡아, 해당 말투가 등장하기만 해도 캐릭터의 성격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에 이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어에 해당되는 이야기로, 예를 들어 동일어미고수 말투의 경우 미묘한 어미의 차이를 번역하면서 그대로 살려낸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원서와 번역서를 번갈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이런 부분에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식상하기 그지없던 말투가 매력적인 한국어로 번역되는 것에서 오는 쾌감이라고나 할까요?

"당신, 정말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바로 <늑대와 향신료> 에 등장하는 호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래 묵은 신령인 호로는 실제로 고풍스러운 말투를 사용하고 있는데, 한국 정발판에서는 그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죠. 그녀의 2인칭인 'ぬし'는 분명히 '당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말투와 묘한 뉘앙스로 인해서 보다 친숙하게 느껴지는 호로가 재탄생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투를 억지로 번역하여 살려내려 했다면, 과연 지금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이런 말을 하면 꼭 "나는 무조건 원판이 더 좋아요 뿌우 -3-" 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확신은 안 하는게 낫겠군요. 임자, 이리로 와보랑께~ 와 같은 말투를 쓰는 호로는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하겠습니다.)
비슷한 예로는 <렌탈 마법사>의 호나미 다카세 엠블러를 들 수 있습니다. 아이스 블루 빛깔의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영국의 전통마법을 익힌 숙련된 마녀로 등장, 소꿉친구인 이츠키를 좋아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를 취하며 차가워보이는 여자아이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근데 그녀는 관서 사투리를 쓰죠. 상대적으로 표준어를 써야 세련된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한 우리나라의 정서를 감안했을 때, 그녀의 말투를 정발판에서 사투리 - 주로 관서 사투리라면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으니 - 로 번역했다면 '차가운 마녀의 이미지'는 많이 죽어버렸을 겁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Room no.1301>에 등장하는, 존재감 없는 투명라인 여자친구 오오우미 치야코와 주인공 키누가와 켄이치의 관계이지요. 정발판만을 보면 이 둘의 대화가 어째서 겉도는지 잘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습니다. 다른 여성들과 관계를 맺고 다니는 켄이치의 성향을 제하더라도, 그냥 평범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이 어째서 저렇게 서로를 멀리만 느끼고 있는지 의아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요. 실제로 저는 그랬습니다. '얘네들이 어째서 가까워지지 않는지?' 가 너무나 궁금했죠.
일본에서는 친구 사이에서도 존대말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말도 안 되는 감각이지만, 그네들 입장에서는 처음 같은 반이 된 친구에게 다짜고짜 이름을 부르며, "너, 어디 살아?" 라고 말을 거는 것이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죠. 오오우미와 키누가와는 서로를 성 + さんor 君 으로 부르며, 심지어 남자인 켄이치마저 치야코에게 존대말을 씁니다. 사귀기 시작한 두 사람임을 가정하면 약간 어색할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과거 관계(클래스 메이트)를 감안한다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은 아니죠. 그렇지만 이것을 한국어로 직역한다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됩니다.
어쩔 수 없는 문화적 차이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이 부분은 '연애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는' 켄이치의 감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제대로 살아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치야코와 대화하는 것은 멀쩡해 보이는데, 어째서 이런 공허한 생각만을 하는 것일까- 라는 의아함이 생겼기 때문이죠. 실제로 이 의아함은 이후 켄이치의 종마 행적과 맞물려, '아, 이 녀석은 관계가 없으면 직접적으로 인식을 못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까지 해 버리고 말았으니.
다음은 굉장히 개인적인 예로, 제가 금서목록에 더 이상 돈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준 츠치미카도 군입니다. 원래 금서목록은 여러가지 면모로 까면서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접을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습니다. 츠치미카도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있어 보이기도 하고, 뒤가 구리면서도 주인공의 근처에 있는 것이 마치 예전의 제로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듯한 부분이 있었죠. 근데 문제는 말투였습니다. 원서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정발판의 어미 번역은 도저히 취향상 더 읽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더군요. 초반에 이 녀석이 비중이 별로 없었을 때는 그냥 스킵하고 읽었습니다만, 9권~10권 즈음이 되자 그럴 수 없게 되어서 결국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번역을 까는 것은 아니고, 그야말로 취향 문제죠. 그런 닭살이 돋는 캐릭터는 보고 있을 수가 없더군요.
(물론 말투 뿐만은 아닙니다. 이렇게 비 남성적인 모습으로 실실대다가 사실은 강했다! 라는 캐릭터는 짜증이 나더라구요. 귀엽다가 잔인한 제로스, 털털하다가 비장했던 쿠거 형님도 비슷하게 혼네를 숨기고 있는 케이스지만 호감이었던 것과는 다르죠.거기다 성우까지 스즈켄 크리..)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고 싶도록 만들어준 장본인 캐릭터는 <뻥쟁이 미군과 고장난 마짱>의 나가세 토오루 양입니다. 뭐 그녀의 말투에 대한 번역 문제는 너무나 많은 분들이 언급을 했기 때문에, 새삼 그걸로 까거나 옹호할(??) 생각은 없고요. 단순히 나가세 토오루라는 캐릭터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겠지요. 그녀가 평범하지 않은 가벼운 말투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고, 1:1 대응이 될 리가 없는 번역이 어려웠던 것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경우, 고풍스러운 말투를 옮기지 않은 호로 & 사투리가 표준말로 바뀐 호나미의 긍정적인 면모를 본다면, 나가세 토오루는 잃은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첫째, 완전히 미친 현재의 여친과는 차별되는, 가볍지만 때로는 깊이있는 모습의 갭 모에의 가능성을 완전히 잃어버렸죠. 둘째, 정상적인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작품에서 차지할 수 있는 2권 메인 캐릭터의 자리도 굳히지 못했습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짱에 버금가는 또라이 캐릭터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결말의 반전(..이랄까, 폭로?)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의 낙차가 줄어들었다는 부분입니다. 정상적인 남자가 '나 실은 게이야' 라고 하는 것이, 립스틱 짙게 바르고 가발을 쓴 남자의 같은 발언보다 파괴력이 크다는 것과 같은 이치. 캐릭터 하나만 버려 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전체의 재미도 반감시키는 아쉬운 결과를 불러온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저는 새삼스레 누굴 깔 생각으로 이 글을 적는 것이 아닙니다. 정발판에는 오히려 원서보다 매력이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그와 반대인 경우도 존재하겠지요. 원서를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는 걸로 까려면, 앞에서 예시로 들었던 작품들도 그냥 까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 작업을 하는 분들은 언어적 차원에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작품 내적인 부분에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대사'일 것입니다. 외모나 행동거지의 묘사도 충분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 되지만,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캐릭터의 이미지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대사를 따라오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의외로 순수문학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며, 대화의 비중이 높은 대중문학이나 장르문학에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죠. 라이트노벨도 비슷한 맥락에 자리하여, 대사는 말투라는 형태로 구체화 되어 캐릭터를 구성하는 굉장히 중요한 재료가 되고 있습니다.
"벼,별로 네가 걱정되는 것은 아니니까! 차,착각하지 마!"
...로 대변되는 츤데레 말투를 비롯해, 정형화된 말투 - 누님 말투, 동일어미고수 말투, 보이쉬 말투 등 - 들은 이미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잡아, 해당 말투가 등장하기만 해도 캐릭터의 성격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에 이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어에 해당되는 이야기로, 예를 들어 동일어미고수 말투의 경우 미묘한 어미의 차이를 번역하면서 그대로 살려낸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원서와 번역서를 번갈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이런 부분에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식상하기 그지없던 말투가 매력적인 한국어로 번역되는 것에서 오는 쾌감이라고나 할까요?

"당신, 정말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바로 <늑대와 향신료> 에 등장하는 호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래 묵은 신령인 호로는 실제로 고풍스러운 말투를 사용하고 있는데, 한국 정발판에서는 그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죠. 그녀의 2인칭인 'ぬし'는 분명히 '당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말투와 묘한 뉘앙스로 인해서 보다 친숙하게 느껴지는 호로가 재탄생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투를 억지로 번역하여 살려내려 했다면, 과연 지금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이런 말을 하면 꼭 "나는 무조건 원판이 더 좋아요 뿌우 -3-" 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확신은 안 하는게 낫겠군요. 임자, 이리로 와보랑께~ 와 같은 말투를 쓰는 호로는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하겠습니다.)
비슷한 예로는 <렌탈 마법사>의 호나미 다카세 엠블러를 들 수 있습니다. 아이스 블루 빛깔의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영국의 전통마법을 익힌 숙련된 마녀로 등장, 소꿉친구인 이츠키를 좋아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를 취하며 차가워보이는 여자아이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근데 그녀는 관서 사투리를 쓰죠. 상대적으로 표준어를 써야 세련된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한 우리나라의 정서를 감안했을 때, 그녀의 말투를 정발판에서 사투리 - 주로 관서 사투리라면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으니 - 로 번역했다면 '차가운 마녀의 이미지'는 많이 죽어버렸을 겁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Room no.1301>에 등장하는, 존재감 없는 투명라인 여자친구 오오우미 치야코와 주인공 키누가와 켄이치의 관계이지요. 정발판만을 보면 이 둘의 대화가 어째서 겉도는지 잘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습니다. 다른 여성들과 관계를 맺고 다니는 켄이치의 성향을 제하더라도, 그냥 평범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이 어째서 저렇게 서로를 멀리만 느끼고 있는지 의아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요. 실제로 저는 그랬습니다. '얘네들이 어째서 가까워지지 않는지?' 가 너무나 궁금했죠.
일본에서는 친구 사이에서도 존대말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말도 안 되는 감각이지만, 그네들 입장에서는 처음 같은 반이 된 친구에게 다짜고짜 이름을 부르며, "너, 어디 살아?" 라고 말을 거는 것이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죠. 오오우미와 키누가와는 서로를 성 + さんor 君 으로 부르며, 심지어 남자인 켄이치마저 치야코에게 존대말을 씁니다. 사귀기 시작한 두 사람임을 가정하면 약간 어색할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과거 관계(클래스 메이트)를 감안한다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은 아니죠. 그렇지만 이것을 한국어로 직역한다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됩니다.
어쩔 수 없는 문화적 차이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이 부분은 '연애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는' 켄이치의 감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제대로 살아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치야코와 대화하는 것은 멀쩡해 보이는데, 어째서 이런 공허한 생각만을 하는 것일까- 라는 의아함이 생겼기 때문이죠. 실제로 이 의아함은 이후 켄이치의 종마 행적과 맞물려, '아, 이 녀석은 관계가 없으면 직접적으로 인식을 못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까지 해 버리고 말았으니.

다음은 굉장히 개인적인 예로, 제가 금서목록에 더 이상 돈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준 츠치미카도 군입니다. 원래 금서목록은 여러가지 면모로 까면서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접을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습니다. 츠치미카도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있어 보이기도 하고, 뒤가 구리면서도 주인공의 근처에 있는 것이 마치 예전의 제로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듯한 부분이 있었죠. 근데 문제는 말투였습니다. 원서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정발판의 어미 번역은 도저히 취향상 더 읽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더군요. 초반에 이 녀석이 비중이 별로 없었을 때는 그냥 스킵하고 읽었습니다만, 9권~10권 즈음이 되자 그럴 수 없게 되어서 결국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번역을 까는 것은 아니고, 그야말로 취향 문제죠. 그런 닭살이 돋는 캐릭터는 보고 있을 수가 없더군요.
(물론 말투 뿐만은 아닙니다. 이렇게 비 남성적인 모습으로 실실대다가 사실은 강했다! 라는 캐릭터는 짜증이 나더라구요. 귀엽다가 잔인한 제로스, 털털하다가 비장했던 쿠거 형님도 비슷하게 혼네를 숨기고 있는 케이스지만 호감이었던 것과는 다르죠.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고 싶도록 만들어준 장본인 캐릭터는 <뻥쟁이 미군과 고장난 마짱>의 나가세 토오루 양입니다. 뭐 그녀의 말투에 대한 번역 문제는 너무나 많은 분들이 언급을 했기 때문에, 새삼 그걸로 까거나 옹호할(??) 생각은 없고요. 단순히 나가세 토오루라는 캐릭터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겠지요. 그녀가 평범하지 않은 가벼운 말투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고, 1:1 대응이 될 리가 없는 번역이 어려웠던 것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경우, 고풍스러운 말투를 옮기지 않은 호로 & 사투리가 표준말로 바뀐 호나미의 긍정적인 면모를 본다면, 나가세 토오루는 잃은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첫째, 완전히 미친 현재의 여친과는 차별되는, 가볍지만 때로는 깊이있는 모습의 갭 모에의 가능성을 완전히 잃어버렸죠. 둘째, 정상적인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작품에서 차지할 수 있는 2권 메인 캐릭터의 자리도 굳히지 못했습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짱에 버금가는 또라이 캐릭터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결말의 반전(..이랄까, 폭로?)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의 낙차가 줄어들었다는 부분입니다. 정상적인 남자가 '나 실은 게이야' 라고 하는 것이, 립스틱 짙게 바르고 가발을 쓴 남자의 같은 발언보다 파괴력이 크다는 것과 같은 이치. 캐릭터 하나만 버려 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전체의 재미도 반감시키는 아쉬운 결과를 불러온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저는 새삼스레 누굴 깔 생각으로 이 글을 적는 것이 아닙니다. 정발판에는 오히려 원서보다 매력이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그와 반대인 경우도 존재하겠지요. 원서를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는 걸로 까려면, 앞에서 예시로 들었던 작품들도 그냥 까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 작업을 하는 분들은 언어적 차원에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작품 내적인 부분에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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