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황혼색의 명영사, 웰메이드 판타지와 한국에서의 한계


작가 : 사자네 케이
일러스트 : 타케오카 미호
레이블 : 후지미 판타지아 문고, NT노벨


 발매된 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국내에 수입이 되는 작품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크게 나누어 볼 때 하나는 시간의 흐름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 줄 만큼 큰 파급력을 가진 작품(은하영웅전설, 성계 시리즈 등)이고, 또 하나는 여러 가지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출간이 늦어진 경우가 되겠죠. 2007년 1월에 1권이 출간된 후, 2년 10개월만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황혼색의 명영사>의 경우는, '작품의 성격' 자체가 시간의 흐름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쪽이라고 분류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수상작이 보여줄 수 있는 이상적인 형태의 구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의 높은 평가(판매량이 아닙니다)도 이러한 부분을 뒷받침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입소문을 통한 기대와 함께 같은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이었던 <문학소녀 시리즈>로 상당한 인지도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장르적 특성과 지나친 투명함 때문에 오히려 한계를 드러낸 대표적인 케이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1. 이브는 새벽에 미소짓고 - 완성도 높은 도입


 라이트노벨을 이야기 할 때 단권 완결성, 1권의 중요성은 항상 언급되는 부분입니다. 어떠한 스토리가 큰 호흡을 갖고 연속적인 흐름을 통해 드러나는 기존의 대다수 판타지, 무협소설과는 달리, 라이트노벨은 한 권이라고 하는 분량을 통해서 느슨한 안식을 맛 볼 수도, 날카롭게 조율된 긴장을 맛 볼 수도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를 펼쳐 나가게 되는 1권이야말로, 그 어떤 다른 에피소드보다도 독자를 매혹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많은 라이트노벨 작품들이 2권 이후의 텐션이 떨어지는 인상을 주는 것도 이러한 이유를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살펴봤을 때, 제18회 판타지아대상 가작을 수상한 <황혼색 명영사> 1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준급의 완급 조절을 통해 조금은 낯선 이야기를 독자에게 훌륭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배경은 평범한 판타지 풍의 세계이며 '명영식'이라는 이름의 마법이 등장하는 것까지도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만, 완전히 다른 소년과 소녀를 등장시키고 그들을 좇는 다양한 시각으로 작품을 비춰 가면서 높낮이를 적절히 조절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 특이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주인공의 성격에 따라 인상이 좌우될 수 있는 형태에 비해서 리스크가 낮은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만큼 캐릭터의 인상이 옅어질 수 있다는 약점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1권 전체를 통해 '인물'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들이 엮어 나가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그것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숨기고 있었던 결말을 통해 충분한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물론 최소한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적절한 이능 요소, 주인공의 활약을 통한 대리 만족 장면도 일부 삽입된 것은 당연한 서비스였습니다.


 2. 인물 추가와 본격적인 이야기 진행


 작가 본인도 후기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좀 더 본격적인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클루엘과 네이트 외의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2권입니다. 에이다라고 하는 매력적인 소녀를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며, 학원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벤트인 여름학교를 배경으로 등장시키면서 보다 친숙한 분위기를 연출하게 됩니다. 거기다 이름만 나왔거나 별다른 활약이 없었던 선생님들의 이야기도 조명하기 시작하죠.

 <에그>와 회색 명영의 등장 역시 장기적으로는 큰 포석이 될 수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 2권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은 지르셰라고 하는 존재가 구체적으로 부각되었다는 점입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마법'과 대치되는 '검'에 해당하는 역할을 채워줄 수 있는 개념의 등장으로, 에이다 부녀가 각각 <E단조>와 클루엘 일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작품이 어떤 쪽으로 나아가든 자칫 명영식 파워 배틀이 되어버릴 수 있는 위험을 줄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클루엘이 적색의 진정을 불러냈고 또 그것을 갈등 해결의 열쇠로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러가지 의미로 이를 견제해 줄 수 있는 소재의 등장은 시기 적절한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3권에서는 어렴풋한 형태만 드러냈던 '적'이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개입하기 시작하는데, 2권에서 침범 받았던 클루엘 일행의 평화는 여름학교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에 있었던 반면에, 3권에는 트레미아 아카데미라고 하는 일상 자체를 구체적으로 파괴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진지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일상과 비일상이 평범하게 섞여 드는 것은 파격적인 재미를 전달할 수는 있지만, 잘못하면 재미 감각의 마비로 이어질 수 있으며 취향에 따라서는 거부감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킬X러브>같은 경우가 대표적). 그런데도 불구하고 3권에서 클루엘 일행을 모두 사건에 휘말리게 한 것은 앞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진행할 것이라고 하는 진지한 자세의 천명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3. 웰메이드 판타지의 한계


 이처럼 <황혼색의 명영사>는  훌륭한 기승전결을 선보이는 도입의 1권, 적절한 캐릭터 보충과 함께 복선을 까는 2권, 본격적인 이야기의 서막을 알리는 3권으로 구분할 수 있는, 구조적으로 굉장히 잘 만들어진 판타지 소설입니다. 그렇지만 그다지 폭발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국내 반응을 생각한다면, 분명 어디엔가에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판타지'라고 하는 장르의 한계도 분명 문제의 하나겠지만, <강각의 레기오스>나 <성검의 블랙스미스>같은 작품들을 생각한다면 무조건 장르탓으로 돌리기도 힘들겠죠.

 정답은 클루엘과 네이트의 관계에 숨어 있다고 봅니다. 두 사람은 세 살 차이라고 하는, 커플로서는 굉장히 적절한 나이 차이입니다. 그렇지만 네이트가 나이보다 여린 면모를 갖춘 소년이고, 클루엘 역시 상대적으로 조숙한(?) 아이이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는 관계로 등장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설정 자체는 굉장히 흥미로울 수 있고, 두 사람이 주인공 커플로서의 매력이 떨어진다고 보기에는 가끔씩 보여주는 알콩달콩한 장면이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첫 번째 항목에서 칭찬했던 부분에 존재합니다. 바로 다양한 시각이라는 부분이죠.

 두 사람은 충분히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캐릭터들이고, 작가 역시 그러한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시각으로 긴 호흡의 이야기 전체를 비추는 데 주력한 나머지, 두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좀 더 재미있는 장면들이 오히려 생략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름학교 이후 방학 기간동안, 두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명영식 연습을 하며 함께 지냈다고 하는 설명이 3권에 나옵니다. 아직 연애라는 감정에 눈 뜨지 못한 풋풋한 두 사람이 다소 어색하게, 그러나 열심히 보냈을 그 여름은 굉장히 흥미로운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캐릭터들의 잡담과 망상만으로 쓴 소설들이 팔리는 마당에, 본격적으로 어둡고 진지한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부분을 킵했다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선택입니다. 맛있는 음식도 따뜻할 때 먹어야 제 맛인데, 아껴 먹는다고 랩에 싸 두면 그만큼 맛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말이죠.

 마찬가지 맥락으로 너무 많은 캐릭터들에게 동등할 정도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카인츠나 이브마리와 관계가 있는 선생님들이나 E단조의 멤버 등의 이야기에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분명 작품성 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좀 더 많은 독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내버려 둔 채 진행시켰다는 것은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모든 친구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비추어 간 이후에 배치된, 클루엘과 미오, 네이트가 등장하는 3권의 클라이막스 연출은 '어떤 감정'의 방향에 주목해야 하는지 독자들을 헷갈리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졌으면 그 어떤 엔딩보다 아름다웠을 의무실 침대에서의 한 마디 역시 이러한 애매한 방향성 때문에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최근 정식 발매되고 있는 작품 중에서는 <하자쿠라의 여름>과 함께 가장 재미있게 감상하고 있는 타이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재미를 느꼈습니다만, 아무래도 두 타이틀을 비교했을 때 좀 더 지나치게 투명한 이 작품 쪽에는 이런저런 아쉬움이 생기기도 하더군요. 어찌 생각하면 이러한 부분은 라이트노벨을 쓸 때도 유념해야 할 점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준비한 것이 웅장하고 아름답더라도, 더 큰 재미의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아까운 것일테니까요. 역시 그런 부분은 레이블의 차이도 큰 것 같습니다. 보다 영세한 레이블에서 나왔으면 방향 수정의 실패를 겪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 하고 말이죠.

by Laphyr | 2010/05/01 01:06 | = 라이트노벨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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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10/05/01 01:1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Laphyr at 2010/05/01 01:34
작가가 무엇을 더 보여주시고자 하는지에 대해서는 지켜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면서도, 1권의 감동을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운 정보네요. 라이트노벨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기가 쉽지 않은데 이 작품은 그야말로 순수한 감동으로 다가왔었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다음에 쓰신 작품도 상당히 인기는 있는 모양인데, 그런 아쉬움 때문에 이 작품의 결말을 보기 전까지는 무서워서 건들이지 못할 것 같네요.
Commented by 노란개구리 at 2010/05/02 20:58
잘 봤습니다.^^ 너무 많은 캐릭터들에게 동등할 정도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부분에서 꽤나 공감이 가네요. 초점을 하나로 맞추지 못하고 세계관에만 너무 치중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인공 커플네 얘기가 다음권에서도 이정도면 그냥 하차하려고 생각중입니다. ㅠㅠ
Commented by Laphyr at 2010/05/02 22:26
잘 보셨다니 보람(?)이 느껴집니다. 클루엘과 네이트 이야기가 더 보고 싶은데, 충분히 잘 그려주고 있는데 제대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 이런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네요(...). 차라리 못 하면 말을 안 하겠는데 말이지요. 그래도 요즘 나오는 것들 중에서는 볼만 한 것 같아요. 예정된 신간들을 생각해도 그렇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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