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6일
라이트노벨 독자의 눈으로 본 디스트릭트9

저는 외계인이 나오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때문에 디스트릭트9 같은 경우도 별달리 사전 정보를 얻고 본 영화가 아니었고, 단순히 거대한 외계인의 모선이 도시 위에 떠 있는 사진만을 보고 관람하게 되었죠. 예전에 감상한 <지구가 멈추는 날>도 그랬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자극적인 - 그것도 19금 - 떡밥을 던져 놓는 작품의 경우는 별 볼 일 없을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감상하면서, 또 감상하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의 가지들을 뻗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영화는 오랜만에 감상한 것 같습니다.
워낙에 많은 분들이 감상한 후에 이야기를 남기고 계시는 작품이라, 내외적인 특징들에 대해서는 굳이 관련 지식이 풍부하지 않은 제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모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되는, 그러면서도 결코 친절하지 못한 도입부나 SF를 표방하면서도 전혀 '그런 쪽'의 기대는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모습, 남아공을 배경으로 하면서 외계인이라는 제3의 등급을 만들어 역사 깊은 인종 차별에 대한 풍자를 하고 있다느니 하는 어려운 이야기들은 말이지요.
다만 제가 해 보고 싶은 것은 제목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라노베 독자의 눈으로 느껴지는 디스트릭트9 이라는 작품의 무서움입니다. 사회학자는 사회현상에 빗대어, 정치학도는 정치구도에 빗대어, 파벌학자들은 평소에 이슈의 대상이던 사건들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펼쳐 놓고 있는 글들을 읽을 수 있었는데, 천상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이거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라노베 쪽과의 연관이었습니다.
1. 비커스의 일상, 라이트노벨의 도입
이야기의 무대는 외계인과 함께 사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도시 요하네스버그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색채가 다르긴 합니다만, 외계인과 함께 사는 미래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원반황녀 왈큐레>와 비슷한 면모가 있습니다. 즉 그들의 세계는 현실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현실이 아닌, 조금 비틀어 둔 가상의 무대라는 거죠.
라이트노벨 속에서는 세계의 설정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서, 이런 식으로 살짝 변화를 주는 식의 무대를 자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처럼의 일상이 존재하면서 바로 근처에 싸움이 존재하는 <작안의 샤나>나 '앤티크'를 제외하면 현실과 다를 바 없는 <부상당 골동품점>와 같이 전혀 다른 성격의 작품들도 비슷한 무대를 독자에게 선보이고 있죠. 이는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세계보다 쉽게 작품에 빠져들 수 있고 익숙한 소재들로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 있는 쌍방의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화 역시 비슷한 맥락을 보이고 있습니다. 거대한 국제조직 MNU의 직원으로 일하는 주인공 비커스는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이 있고, 동시에 자신의 성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2000년대 이후의 라이트노벨에서는 주인공이 처음부터 거창한 설정으로 등장하는 경우보다는 비일상과의 조우를 통해 각성해 나가는 형태의 비율이 높아졌는데, 비커스의 일상은 그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평범한' 일상을 독자 혹은 관객에게 보여주는 목적입니다. 라노베의 주인공이 싸우는 미소녀를 만나기 전에 보내는 평범한 일상은 독자가 작품을 이해하기 쉽도록, 따라가며 감정 이입을 하기 쉽도록 하는 장치인데 반해 비커스가 보여주는 너무나도 적나라하며 사실적인 일상은 모두가 비커스와 크게 다를 바 없을 현실의 우리들을 향한 매서운 일침이라는 것입니다.
요즘의 라노베 주인공들이 보내는 '일상'은 식상하기 그지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어필하기 위한 시간 때우기 형태이기 일쑤라는 겁니다. 툭하면 부모님이 해외 업무로 집에 혼자 사는 고등학생이 등장하고, 학교에 가면 별로 특별한 것도 없는 아인데 여자애들한테는 인기가 좋거나 합니다.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결코 희노애락 중 어느 하나만 존재하는 꿈 같은 것이 아닙니다. <디스트릭트9>의 비커스가 보여주는 일상은 그것을 너무나 매섭게 관객들에게 들이대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는 겁니다.
즉 부모님 없이 고등학생이 집에 혼자 살려면 현실적으로 얼마나 힘든지, 혹은 별달리 존재감 없는 남자애가 (1권의 사카이 유지처럼) 여자애들한테 관심을 받거나 하는 상황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고나 할까요. 실제로는 비커스처럼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2. 외계 바이러스 감염, 라이트노벨의 비일상
라이트노벨의 1권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역시 주인공이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들어가는 사건에 관해서일 것입니다.
MNU의 성공한 관리인 비커스는 승진 후 디스트릭트9에서 디스트릭트10으로의 외계인 강제이주 작업을 지휘하던 도중 사고로 인해 외계인으로 점점 돌연변이화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얼핏 생각하면 단순한 상황 변화에 지나지 않겠습니다만, 이 작품에서 '외계인'이라는 단어가 지닌 키워드를 생각하면 비커스의 이러한 돌연변이에는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라이트노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특수능력의 각성" 이죠.
영화의 세계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은 비록 지휘계통을 잃고 욕망에 충실해진 하등한 모습을 보이지만, 무기 제조 기술 등만은 인류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면모를 보여줍니다. 기껏 만든 레이저 총을 고양이 먹이 100개와 바꾸어 가는 모양새는 굉장히 우스꽝스럽지만, 그 무기가 단발에 사람을 터뜨려 죽일 수 있는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죠. 문제는 그러한 무기는 외계인의 DNA에만 반응하여 그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요. 이제 감이 오시죠?

비커스는 다쳤던 왼팔을 시작으로 점점 추악한 외계인의 모습으로 변해가지만, 그 댓가로 인간을 능가하는 힘과 외계인 무기를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얻습니다. 하지만 그가 속해 있던 조직인 MNU는 물론이고 상급자인 그의 장인까지 변이하는 비커스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외계인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할 연구재료로 생각할 뿐이죠. 이에 반해 <인피니트 스트라토스>(MF문고J, 弓弦 イズル)의 이치카는 여성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무기 '인피니트 스트라토스'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남성으로 각성하지만, 비커스처럼 생체 실험을 당하기는 커녕 여학생들만 바글거리는 IS학원에 입학하는 행운(?)을 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힘을 얻으려는 갱단의 모습)
특수능력의 각성, 이능력의 발휘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멋진 말로 들립니다만,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해 보면 수많은 억지라고 하는 토대 위에서 빛을 발할 수밖에 없는 한정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비커스의 돌연변이도 분명히 이능력의 각성이고, 심지어 극중에 등장하는 갱단 두목은 외계인 무기를 사용하고 싶어서 '나도 네 팔처럼 되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다르죠.
3. 배드 엔딩? 또 다른 가능성
엔딩에 대해서도 라이트노벨을 끌어와서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만, 솔직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잘 생각이 나지 않더군요. 도입과 이야기 진행까지는 너무나도 많은 작품들과의 대비가 되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작품이 끝나는 경우를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업계이다보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서 내용적으로 불만을 토로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아무래도 엔딩일 겁니다. 조크를 던질 정도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감정적으로 돌변한 크리스토퍼(주: 외계인임)의 행동도 개연성이 부족하고, 비커스가 마지막에 보여준 사카가미를 연상시키는 열혈 돌진 역시 그가 초중반 보여줬던 캐릭터 & 목적의식에 비하면 위화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여기서도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 굳이 라이트노벨을 연관 지어 상대적으로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캐치할 수 있는 사실성이라는 면모가 드러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분명 비커스를 움직이게 했던 것은 어떻게든 살아서 아내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일념이었으며, 심지어 동료의 뒤통수를 때릴 정도로 절실한 행동력을 보여줬었죠. 그런 그가 앞뒤 없이 간디 정신을 발휘한 것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그가 보여준 폭주는 라노베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사건의 해결 방식입니다.
이전에는 능력조차 없던 주인공이 능력을 각성하고, 그것을 사용해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반 무의식중에 사건을 해결한다, 라는 유형은 결코 드문 엔딩이 아닙니다. 에바 이후 각종 콘텐츠를 가리지 않고 등장했던 폭주물의 기초가 되는 설정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깔끔한 뒷처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공 확률 2%, 손상 확률 98%의 도전에 감행해도 작품의 주요 갈등이 되는 사건을 그것으로 해결한 후 남은 2%로 엔딩을 꾸려가는 그러한 형식이지요.
그렇지만 너무나 사실적인 이 영화는 결코 그렇지 못했습니다. 외계의 무기가 아니라 로봇까지 손에 넣은 비커스는 총알을 튕겨내고 날아가는 미사일 포탄을 손으로 잡는 등 나름대로 멋진 폭주 장면을 보여줍니다만, 그것이 엔딩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와 그 아들을 보내며 바라보는 그의 의미심장한 눈빛은, 실패했기 때문에 비로소 빛을 발했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과연 그를 일단 모선으로 데려가 돌연변이를 고치고 다시 내려오고 외계인은 집으로 가고 - 이런 win-win 엔딩이었더라도 지금 같은 여운이 남았을지 의문입니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하려면 영화 자체를 뜯어 고쳐야 하겠죠.
# by | 2009/10/26 01:20 | = 애니메이션잡담 | 트랙백 | 덧글(5)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비커스가 마음을 돌려 크리스토퍼 부자를 돕게 된것도 영화에선 극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집에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이 좌절되고 난 후(아마도 비행선 추락 직후) 자신만큼이나 집에 돌아가고 싶어 했을 크리스토퍼 부자에 대한 감정이입으로 설명하는게 깔끔할 듯.
"가라! 크리스토퍼! 나는 이미 글렀어! 너만이라도 집에 돌아가! 내가 전력을 다해 널 집으로 돌려보내 주마!"
"…3년이다, 비커스, 3년 후에 꼭 구하러 오겠다아아아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열혈 모드로(...)
하지만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할만큼 현실에 뿌리를 내린 영화니 그럴 수는 없었겠지...
라노베였다면 진짜 자네의 의견처럼 열혈 절규 장면들이 나왔을지도 모르겠고, 오히려 그랬다면 일부 이 작품에 실망하는 태도를 취하는 관객들은 차라리 재밌다~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구만.. 매력이 있기는 있다 근데.
확실히 설명을 해 보면 납득이 못 가는 행동들은 아닌데, 그것이 어차피 심리변화 부분이기 때문에 영화의 특징상 별달리 표현이 안 되서 문제가 되는 듯.. 그만큼 생각을 많이 하고 보라는 건가!
3년 후를 보고 싶었는데 아직도 머리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내요.ㅠㅠ저도 다 잘풀렸다면 이런 여운은 안남았을것 같다고 생각하긴하는데 너무 아쉬운 것 같아요.그리고 마지막 비커스가 외계인된것처럼해서 쓰레기로 장미 만들면서 끝나잖아요. 전 그장면이 너무 슬펐어요..ㅠㅠㅠㅠㅠ 아~~~답답해
외계인 색깔도 그렇고 눈망울도 그렇고 그런 관람객들의 반응을 기대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