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殺X愛 (킬x러브) 0권 - 상상과 첫인상



작가 : 카자미 메구루
일러스트 : RIKY(한국판)
출판사 : 후지미 판타지아 문고, J노블


 아기새가 알에서 깨어난 이후 가장 처음으로 대면한 상대를 어미로 인식한다는 각인(imprinting) 현상은 굉장히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소재로 변형시킨 이야기를 소설에서 만나볼 수도 있고요. 하지만 굳이 알에서 깨어나는 아기새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어디서나 첫인상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은 더더욱 일반적인 사실입니다. 많은 경우에 그런 것처럼, 사람들은 굉장히 일반적인 사실들을 종종 까먹곤 하지만요.

 이는 우리가 직업이나 취미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수많은 경우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재석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구름 위의 사람(?)이 되어도 여전히 그의 이미지는 친숙한 국민MC이며, 박찬수 선수가 프로토스를 꺾고 우승을 했어도 여전히 '프막(프로토스전을 잘 못함)' 의 이미지는 잘 지워지지 않고 있는 것처럼요.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텍스트 위주의 컨텐츠일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상의 여지를 갖게 되므로, 작가가 제공하는 '첫인상'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이 크죠. 그것이 캐릭터든, 스토리든 관계없이 말입니다. 


 1. 殺 - 죽음의 시작


 <킬x러브>의 도입부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아무래도 두 다리가 날아가고 한 팔이 찢겨진 채 나뒹굴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일 것입니다. 얼핏 보면 '이미 끝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통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죠. 랩핑을 뜯지 않고 앞부분을 읽어볼 수 있는 문고본의 특징을 감안한다면, 아름다운 일러스트 + 충격적인 도입이라고 하는 두 가지 자극을 동시에 줄 수 있는 무기를 갖춘 셈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 작품에서도 분명히 학원, 연애, 배틀 요소는 등장합니다. 등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죠. 그렇지만 어디에나 있는 소재를 평범하게 배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범하지 않다'는 느낌을 금세 받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킬x러브>라는 작품이 보여주는 첫인상으로, "평범함을 잃어버린 학원물" 이라는 형태에 가까운 느낌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무기로서의 장점도 갖춥니다만, 결과적으로는 독자들도 작품 내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함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아쉬움을 안고 있습니다.

 이는 독자들에게 굉장히 친절하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불친절합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이능으로 돌입하는 작품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런 이야기가 호응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데요, 동시에 그런 작품들이 욕을 먹는 이유는 한결같이 '일상 - 만남 - 비일상' 의 판에 박힌듯한 테크트리를 밟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호응을 받는 이야기를 쓰면서도 욕을 먹지 않게 쓰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나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하루히 시리즈>, <이리야의 여름, UFO의 하늘>의 1권의 형태가 되겠죠.)

 <킬x러브>는 분명히 독특한 첫인상을 안겨 주긴 했습니다만, 그것이 하나를 포기한 둘의 형태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일그러진 세계를 숨기고 이야기를 소개하는 방법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며, 만약 그랬다면 0권이 보여주는 충격은 현재와는 다른 방향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겠죠. <The BigO>에 등장하는 패러다임 시티의 정체가 소름 끼치는 전율을 느끼게 해 준 것처럼, <킬x러브>의 "회수" 또한 지금의 형태보다 치명적이었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2. 愛 - 사랑의 끝


 1인칭 서술로 '사랑에 빠진 사람' 의 목소리를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 화자가 정상인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더더욱 힘들죠. 사랑의 형태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에, 전문적인 로맨스 소설에서조차 모든 독자를 만족시키는 대표적인 사랑의 속삭임을 꼽기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0권에서 나타나는 역겨운, 순화를 하자면 어색한 히소카의 언동의 이유는 결국 그가 이미 끝난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점점 회수되는 세계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더 미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유일하게 그를 지탱해주는 밧줄이 '사랑' 이라는 불확실한 감정의 영역에 묶여 있다는 것은 독자에게도 불행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소꿉친구 라이카에게 보여주는 행동은 Boy meet girl 러브 코미디 계열에서는 매우 흔한 왕도에 가깝습니다. 승패를 계산해보진 않았습니다만, 아마도 0승 12패 정도 되지 않을까 싶은 (08-09 시즌 프로리그 삼성의 모 테란의 전적과 똑같은 것 같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소꿉친구 캐릭터'의 미래는 굉장히 암울한 것이 현실이죠. 게다가 적절한 대쉬, 그리고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1인칭 서술의 무신경함까지, 굉장히 식상합니다. 이것은 하렘물의 남자 주인공이 흔히 보여주는 모습과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겠죠.

 차이점은 근본적인 부분에 있습니다. 앞으로의 알콩달콩 연애 스토리 전개를 위해 둔감한 주인공을 설정하는 것과, 이미 끝나버린 사랑만을 믿고 기다리는 불안정한 주인공을 설정하는 것은 굉장히 차이가 크니까요.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새가 비슷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마이너스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히소카가 진지하게 무시하든 둔감하게 무시하든, 미쳐서 무시하든 몰라서 무시하든 그의 행동 패턴 - 모르는 척(?) - 이 지루할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거든요. 마찬가지로 나기사와 타케루의 사랑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또한 너무나 애절해도, 두 사람의 캐릭터가 굉장히 뻔하고 식상하다는 것을 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원서의 이미지)


 조금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위와 같은 불만들을 토로할 수 있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킬x러브>는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그만큼 아쉬움이 많기도 했지만요. 그래서 작가인 카자미 메구루 씨는 이 작품을 집필하고 조금 생각을 바꾸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지적하고 있는 아쉬운 가능성에 대해서 작가가 모를리도 없었을 테니,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치진샤 문고에서 나오고 있는 <여제 류오인린네의 첫사랑>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만약 그 작품에서 뭔가가 터져준다면, 확실히 제가 생각했던 <킬x러브>의 문제점을 완전히 보완하는 형태가 될 수 있을테니까요. 
 (물론 터져주지 않고 그냥 이대로 흘러가면 더더욱 별 게 없는 작품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by Laphyr | 2009/08/06 21:05 | = 라이트노벨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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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악몽의현 at 2009/08/06 22:18
대단한 소설 같네요. 주인공이 처참하게 구를 줄이야.
Commented by Skeith at 2009/08/06 23:26
이녀석은 지난번에 사려다 고민한(?) 그녀석이로군요. 눈물샘을 자극하는 녀석과 연애물엔 약하지만 의외로 당기는데요?
Commented by Linesys at 2009/08/06 23:28
오우 카자히메 시키님의 소설이구나. 한번 봐볼까...
Commented by sonkohan at 2009/08/06 23:49
이번 0권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오! 해피 엔딩? 으로 생각했는데, 느닷없는 반전형 결말...
흔히 말하는 캐안습이더군요..ㅠ_ㅠ
Commented by Laphyr at 2009/08/14 22:46
그러나 그 반전으로 인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따져보면 오히려 잃은 것이 많지 않을까 생각도 되더라구요.
Commented by 이루릴 at 2009/08/07 18:05
라피르님의 글이 저 작품에 대한 첫 인상인데 아직 저와의 궁합을 판단하기 어렵군요. 요즘은 나이먹고

옆구리 쑤시다보니 단순-명쾌-발랄-므흣 종류만 땡기더라구요 ㅋ (저 작품은 반반일것 같은데 맞나요?)

앞으로 계속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
Commented by Laphyr at 2009/08/14 22:45
초반은 반반에서 원하지 않는 반 쪽이 많은 느낌이 있는데 중반 이후로는
나머지 반 요소도 상당히 등장하기 때문에 역시나 반반이 아닐까 싶어요.
Commented by 티오 at 2009/08/09 10:14
원서와 정발본의 이미지가 달라?! 게다가 0권이라니... 뭐...뭐지 'ㅁ'!?!??

요즘 리뷰를 읽을 때마다 제 장바구니가 점점 무거워집니다 =_=;;; 으어어어 ;ㅁ;;;;;;;;;;;;;;;;

boy meet girl + 이능 배틀은 워낙 제가 좋아하는 부류라 =_=;;; boy meet girl의 비중이 높다면 더더욱 =ㅁ=!
Commented by Laphyr at 2009/08/14 22:45
일본에서도 0권으로 시작했었기 때문에 별다른 차이는 없습니다.
0권이 나중에 나오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식도 나쁘지 않은 것
같더라구요.
Commented by 세이앤드 at 2009/08/13 21:02
이 글은 '카자미 메구루'님의 블로그 '형이상학기적blog'에 실렸습니다

카자미 메구루님이 열심히 인기가 있으라고 전파를 보내고 계시네요.
Commented by Laphyr at 2009/08/14 22:42
와...... 완전히 깜짝 놀랐네요.
알려주시지 않았으면 몇 달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거나 아예 몰랐을수도..
어쩐지 어제 접속자 숫자가 이 포스팅이 가장 많길래 뭔가 이상하다 했었는데 말입니다. -_-;;;
여하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걸로 포스팅 거리가 늘었...... 다는게 문제는 아니지만..;;
여튼 싱숭생숭..
Commented by 윤소현 at 2009/11/23 14:51
도입부?!

0권?! 표지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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