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5월 04일
[감상]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3권 - 인위성

일러스트 : 야마사키 토오루
레이블 : 가가가 문고, J노벨
1. 취향 - 재미
이번 에피소드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인류의 고대유적 - 이라고 하지만, 현재 입장에서 생각하면 먼 미래의 테크놀로지 - 을 탐험하게 된 두 소년소녀의 이야기가 주가 되는데, 이 고대유적이라는 것이 폐허가 된 도시라는 것이 취향에 잘 맞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말 후의 세계, 혹은 종말에 가까워진 세계' 라는 분위기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폐허가 된 도시에 주인공 일행만 남아, 여러가지 상황에 맞닥뜨리며 살아가는 내용이 주로 여기에 해당되지요. 애니메이션으로는 <쿠로가네 커뮤니케이션(1998)>이나 <청의6호(1998)> 등, 라이트노벨로는 <소금의 거리>나 <여행을 떠나자, 멸망해가는 세상의 끝까지>, 영화로는 <나는 전설이다(2007)> 정도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노쇠한 거리의 잔해에서 옛날의 영화를 추억하거나, 낡아빠진 가구의 먼지를 헤치며 과거의 모습을 엿보는 장면 등은 빼놓을 수 없는 일상 파트의 매력이 될 것입니다.
3권에서는 이러한 매력이 굉장히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녀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될, 거대한 껍질 속의 폐허가 된 도시를 헤매는 모습 속에 말이지요. 오래된 찬장 속을 뒤져 깨졌지만 귀여운 머그컵을 발견한다거나,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 전자기기를 조작하며 발굴하는 장면 등은 위에서 이야기한 왕도를 충분히 따르고 있으며, 마지막에 준비되어 있는 결말 역시 '발견'이라는 보상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2. 약점 - 설득력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한 분에게 "인류라는 종족이 그렇게 쉽게 멸망할 것 같지는 않다" 는 의견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작품의 재미를 떠나, 근본적인 설정을 뒤집는 말씀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인류는 쇠퇴했습니다>에 '멸망의 이유'가 제대로 나와있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잔혹하고 차가울 현실의 이야기는 동화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생략했을 것이라고 너그러이 넘어갈 수도 있겠지요. 근데 3권을 읽으면서, 어째서 이 작품의 인류는 멸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저는 '종말 후...(이하생략)' 라는 배경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 배경에서 느낄 수 있는 '일상 파트의 매력'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을 했죠. 하지만 그런 작품들은 대부분 과거를 추억하는 것에서 이야기가 끝나지는 않습니다. '종말 후..(이하생략)' 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하며, 그 노력은 과거 유산의 발굴이나 문명 혜택의 복원, 그들만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움직임 등으로 나타나게 되죠. 사지에 몰리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모습, 거기에 따라오는 모험과 전투(직접적, 혹은 간접적)가 '비일상 파트의 매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전설이다> 에서 윌 스미스가 혼자만 집에 틀어박혀 비디오 게임만 하다가 죽었다면? <소금의 거리>에서 인간들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면? 무너진 빌딩과 아무도 없는 거리를 누비며 감상에 젖을 수는 있어도, 그와 같은 이야기가 탄생할 수는 없었겠죠.
본 작품의 치명적인 모순은 이 부분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류쇠퇴>의 세계는 굉장히 아슬아슬한 것 같지만 어지간한 환경은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배급'과 '캐러반'이라는 편리한 소재를 등장시켜 해결해 두었고, 주인공은 과자 만들기와 티 타임에 중독될만큼 나름대로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죠. 세상에 어느 서민층 딸 아이가 과자나 만들고 차나 마시면서 돈을 벌겠습니까? 현실적인 감각으로 바라봤을 때, 그녀를 비롯한 마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로 '멸망해가는 세계'의 사람으로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겁니다.
3권에서는 잃어버렸던 문명의 이기, '전기'가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을에 축제를 열 수 있을 정도의 전기를 제공하는 것은, 놀랍게도 무한한 에너지를 제공할 수 있는 궤도 상의 발전위성. 이런 것까지 존재했었단 말인가?! 라고 놀라기 이전에, 이런 걸 사용할 수 있으면서 어째서 지금까지 무력하게 살아왔는가?! 라는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설정입니다. 차라리 없다고 단정을 지었다면 설정이니까 그러려니 하겠지만, 과거의 영광을 복원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존재했음에도 이런 생활을 계속했던 이유는 대체 뭘까요. 거기다 그것을 훼손시킨 소녀의 사고방식은 마치 미쳐있는 것 같았고, 그녀에 대한 처분 역시 너무나 미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겨우 바늘방석 정도로 주체를 못 하시다니, 저 같았으면 못이 박힌 관에 넣어드렸을 겁니다, 조정관 님.
3. 단점 - 인위성
1권은 요정님들의 매력으로 치유되는 장점이 있었고, 2권은 작가 특유의 베베꼬인 에피소드가 오묘한 재미를 선사해줬습니다. 어느 쪽도 일상에 맞닿은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에서 따뜻한 느낌이 풍겨 나왔다는 것은 동일하며, 요정이라는 신비한 존재는 거기에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3권은 좀 다릅니다. 애초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치유계 느낌을 주는 작품에 전면적으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에러입니다.
저는 예전에 이 작품을 '잘 쓴 치유계 작품' 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었지만, 처음부터 치유계와는 거리가 있다고 보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분류를 떠나서 분위기 속에 치유계의 느낌이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러한 느긋함과 따뜻함이 장점으로 작용하면서 독특한 소재와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소녀의 말투와 몸짓에, 그윽한 홍차의 향기에 취하는 티 타임에, 귀여운 요정님들과의 아기자기한 일상 전개까지, 부족함이 없는 치유계 성향이 담겨 있었죠.
그런데 3권에 등장하는 도시유적 탐사에서는,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까지 몰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은 극적인 상황에 몰리면 변한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이야기이지 소설 속의 캐릭터에게까지 적용되는 법칙은 아니죠. 때문에 조정관 소녀와 조수 소년의 태도는 그러한 상황이 되어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즉, 출구를 알 수 없는 미궁 속을 헤매면서 탈수 증상에 시달리면서도 평상시의 느낌, 과자를 만들어 먹고 차를 타 마실 때와 비슷하다는 것을 의미하죠. 이 작품에서 인간의 추한 모습을 파헤쳐 달라는 주문을 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홀로 굴러 떨어진 새까만 공간 속에서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돌계단이에요, 이거." 라는 혼잣말을 내뱉는 주인공의 모습이 너무나 작위적이라는 비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소녀의 할아버지 역시 비슷한 맥락의 어색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애시당초 이상한 인물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도시유적, 거기서 조난되었다가 며칠만에 겨우 연락이 닿은 손녀에게 '지원은 해 줄 수 없다. 자력으로 빠져나와라' 고 주문하는 할아버지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굶주린 늑대들 사이에 제자를 밀어넣으며 수련을 시키던 동방불패 마스터 아시아가 아닌 이상에야, 친손녀가 아니라서 그런 것이 아닌 이상에야, 결국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바로 '인위적 이야기' 라는 한계입니다. 목숨을 잃을 상황이 가까워져도 평소와 다름없는 소녀, 조난당한 손녀를 걱정하지 않는 할아버지, 이들의 모습은 '어차피 배드 엔딩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죠. 이 때문에 모험 이야기는 흥미는 있으나 자연스럽지 못하고, 긴장조차 느껴지지 않는 '동화'로 전락하고 맙니다. 상당히 잘 소화된 느낌이었던 1,2권과 비교가 되기는 하지만, 위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이것은 소재 선정의 문제입니다. 처음부터 동화적인 부드러운 느낌으로 시작된 작품이었기에 상황에 따라 갑자기 작풍을 바꿀 수는 없었으며, 거기서 오는 무리는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한 에피소드를 위해서 전체를 희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겠죠.
4. 아쉬움
굉장히 억지를 부리는 느낌이 드는 3권이었지만, 일단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위험한 상황과는 맞지 않는 부드러운 묘사가 때로는 실이 되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일상 파트의 매력'은 오히려 증폭시키는 효과도 있었으니까요. 또한 두 탐사선(?)의 등장 때문에 약간은 혼란스러웠어도 에피소드 자체가 지니고 있는 요정 - 인간 관계에 대한 메시지는 충분히 전해졌다고 여겨집니다. 여러모로 소재 선정이 즐거움 반, 아쉬움 반이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절대로 귀여운 요정님들의 등장씬이 적었다고 불만을 가지고 까는 글이 아닙니다.
# by | 2009/05/04 15:49 | = 라이트노벨 | 트랙백 | 덧글(1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어떠한 급박한 상황이 닥쳐와도 도무지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는 바람에 인류는 소멸했고,
(예를 들어, 엄청난 가뭄이 들었는데 까짓거 물 좀 안 마시면 어때 이러면서 산다든가)
머~~엉한 캐릭터들과 분위기는 이걸 빙 돌려서 표현하는 것이라면...
...구인류는 지구의 인류가 아니고 저기는 지구가 아닌 듯.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지구의 인류는 서로 처죽여서 공멸한다면 모를까 사이좋게 소멸할 것 같지는 않네요.
(이건 이것대로 너무 삐딱한가요;;)
전기 송전 시설을 빠개버렸는데 삭발과 귀여운 감봉 등의 조치로 끝난다는 것이 어이가 없어요..
애초에 "인류가 의욕 상실하고 멸망만을 기다리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 전제로 등장했던 것 같기는 한데, 정말로 머리로 이해하기 힘든 전제이다보니 알고는 있어도 어색함이 느껴진다고 해야할지..
예를 들자면 스트라이크 위치즈에서 팬티 = 팬티가 아니다 라는 설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모습에 민망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될 듯..
인위성은 그 연장선에 있다고 봅니다.
전 재미있었지만....
아, 이렇든 저렇든 요정님 귀여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