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 05일
[리뷰] 색다른 판타지 - 제비뽑기 용자님

작가 : 시미즈 후미카
일러스트 : 우시키 요시타카
현지 레이블 : HJ문고
국내 레이블 : L노벨
1. 판타지형 라이트노벨과 한국 시장
우리나라에서는 판타지 소설이 굉장한 인기를 누렸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PC통신의 발달과 함께 어려운 것으로만 여겨졌던 '글쓰기'에 대한 문턱이 굉장히 낮아졌으며, 몇몇 통신원작 판타지 소설이 대히트를 기록한 이후 더욱 많은 판타지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지요. 눈여겨볼 점은 비슷한 시기에 일본문화 개방으로 음지에서만 접했던 만화, 애니메이션 등에 대한 활발한 이야기 교류도 함께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작품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소위 잘 팔린다는 작가의 판타지 소설에서 카드캡터 사쿠라 방영 이후 벚꽃잎과 함께 등장하는 소녀를 만날 수 있었고, 에스카플로네 방영 이후 용을 타는 소년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작품 수가 불어나는 만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설정,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줄거리를 읽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복잡한 법적, 상업적 논리는 배제하더라도, 같은 시대에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수많은 작품을 만나야 했다는 사실 자체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불행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본의 라이트노벨의 장르를 이야기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판타지 작품군입니다. 유명한 델피니아 전기나 스크랩드 프린세스 등을 비롯하여 최근의 하늘의 종이 울리는 별에서, 이코노클라스트, 흔들흔들 일렁이는 바다 저편 등의 작품이 '라이트노벨' 레이블에서 수입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우스운 일입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옛날에 국내에 판타지로 소개되었던 로도스도전기, 슬레이어즈 등의 '대륙물'과 마찬가지로 기존 판타지 작품과도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굉장히 실질적인 부분인 판매량과 인기 등에서 어느정도 정리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대부분 잘 안팔린다는 것이죠. 한국 판타지 소설도 안 보는데 굳이 일본 판타지 소설을 읽을 필요가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고, 항상 비슷한 패턴의 대륙물의 스토리 전개에 대해서 식상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내가 바라는 형태의 라이트 노벨이 아니다' 라는 씁쓸함일 것입니다.
2. 해법 - 소재 or 2차적 요소
그러나 여기에 큰 목소리로 반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작품이 존재하죠. 바로 제로의 사역마입니다. 이 작품은 한국형 차원이동 판타지와 흡사한 구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독자들에게까지 인기를 얻는데 성공했습니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다소 선정적인 장면 등은 호기심을 자극했고, 시종 가벼운 분위기로 일관하다가 가끔씩 등장하는 진지한 갈등은 눈요기 소설이라는 비판을 어느정도 무마시켰죠. 그런데 이와 같은 작품을 국내 판타지 소설에서 찾아볼 수 없느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제로의 사역마라는 작품은 애니메이션의 히트를 등에 업고 지금과 같은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국내 판타지 소설은 꿈도 꾸지 못할 매력적인 애니메이션의 시기 적절한 지원사격은 이미 일본 컨텐츠를 실시간으로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국내 독자들에게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로의 사역마는 '현재 한국 시장에서 판타지형 라이트노벨이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적인 정답으로는 적절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다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내용적으로는 아슬아슬한 수위 줄타기를 계속하고, 1~2년 내로 교단까지 형성할 만큼(?) 엄청난 인기를 얻을 것 같은 성우를 히로인으로 발탁하여 이쁘장한 애니를 만들라" 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정답을 제시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겠지만, 저는 <제비뽑기 용자님>을 읽으면서 하나의 가능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이 가장 무난하게 반기는 것이 비일상 학원 이능물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판타지에도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3. 일상 속의 일상, 비일상 속의 비일상
많은 판타지 작품 속에서도 특이한 능력을 사용하는 캐릭터는 많이 만나볼 수 있지만, 그들은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인물들에 비해서 '당연하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노출이 심한 가죽슈트로 몸을 감싸고 화염구를 던져대는 미모의 마법사가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싸우는 것보다, 맥도날드를 날려버리는 것이 더 신선하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판타지 형식의 라노베에서도 충분히 흥미로운 비일상이 등장하지만, 수많은 판타지 소설에 익숙한 - 독서의 여부를 떠나서 - 국내 독자들은 '그것은 판타지 소설에서 당연한 일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학원 이능에 비해서 재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판타지 소설' 이라는 특정된 시장을 갖고 있는 국내 독자들과, '라이트 노벨' 이라는 범주 안에 묶여 나오는 판타지 형식 작품을 접하는 일본 독자들의 환경적 차이입니다. 때문에 일본 독자들이 충분히 흥미로운 비일상으로 받아들인 검과 마법의 이야기도 국내 독자들은 냉담하게 반응합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검을 쓰던 기사가 그것으로 사건을 해결해도 '일상'의 범주로 해석해버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비뽑기 용자님>이라는 작품은 조금 특이합니다. 여느 판타지와 마찬가지로 검과 기사, 용과 마법이 등장합니다만, '제비뽑기' 라고 하는 신선한 소재가 양념 구실을 톡톡히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작품의 세계에서는 어려운 일을 결정할 때 신탁에 따라 제비뽑기를 실행합니다. 아이의 장래, 직업의 결정 등과 같은 일상적인 일에서부터 의회 토론, 국가적 위기의 해결 등 심각한 일까지 마찬가지로요.
단순히 '선택' 이라는 행위가 '제비뽑기' 로 치환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신앙과도 같이 자리잡고 있는 이 세계의 사람들은, 의식 속에 제비뽑기라는 행위가 깊숙히 심어져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멀쩡해 보이던 소녀가 제비를 뽑더니 50살 연상의 남자에게 시집을 가도, 산에 가려던 사람이 제비를 뽑더니 배를 만들수도 있습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요상한 배경 설정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상'이라는 점입니다.
주인공인 수녀 견습생 메이벨은 이러한 일상 속에서 철저히 피해를 보며 살아온 소녀입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제비뽑기를 통하여 수녀가 되었으며, 열여섯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박식함을 갖추고 있어도 신세는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 처지이지요. 그런 그녀는 당연히 제비뽑기를 원망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혼잣말 설명(흥분했을 때 별 상관없는 지식을 주절주절 읊어대는 버릇)' 은 어떻게 보면 그만큼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인생사를 대변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제비뽑기는 엄격하고, 작가의 손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그녀를 푸념투성이인 평범한 일상(?) 속에 놔둬서는 재미가 없으니까요.
전설의 검의 선택을 받은 왕자가 마왕을 무찌르기 위한 여행을 떠나거나, 저주받은 운명을 받고 버려진 공주가 살아남기 위해 여행을 떠나거나, 다른 세계에 떨어진 주인공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있어서 일상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제비뽑기로 용자로 뽑혀서 세상을 구하기 위한 사명을 부여받는다는 것은 어떨까요. 그 용자님은 어디로 가서 무얼 해야 하는지도 스스로 정할 수 없으며, 그것도 모두 제비뽑기로 정해야 된다는 황당한 규칙에 얽매여 있다면요. 거기다 그들의 여행이 믿음직스럽지만 고지식하고 감정 표현에는 젬병인 남자아이와 박식하지만 현실적이고 또래 소녀들처럼 수줍음을 탈 줄 아는 여자아이의 여정이라면?
별 생각없이 읽어버린다면 그냥 조금 특이한 배경 설정을 가진 판타지 소설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판타지 장르가 국내 라이트 노벨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는 현실과 그 이유를 감안했을 때,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에서도 HJ문고 주력 타이틀 중 하나로 8권까지 발매 중이고, L노벨 측에서 이벤트까지 기획하며 밀어주는 것을 감안하면 정발 속도도 빠를 것 같은데 어떤 반응을 얻을 수 있을지 기대되네요.
# by | 2009/01/05 12:19 | = 라이트노벨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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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라는 틀 안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 위 소설은 재미있어 보이는군요. [제비언이 살짝 떠오르긴 합니다만]그리고 이 새로운 요소를 작품이 계속되는 내내 꾸준히 어필하면서 이끌어 나간다면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독특한 작품이 나올거라 생각됩니다. 가끔 보면 초반에만 반짝! 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요소를 쓴 다음에 나중가서는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있어서요;
Skeith// 애초에 설정이 굉장히 참신한 방향이니까, 나중에 똑같은 소재를 써먹더라도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 8권까지 어느정도 잘 나가고 있는 작품이니 흐지부지로 끝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제목없음// 목이 두개 달린 것 같다는 반응이 제일 많더군요. ㄲㄲ
읽어보니 굉장히 흥미가 가네요 @_@
말씀하신대로,
이미 기존 판타지 소설에서 꾸준히 이루어져서 (검을 들고 싸운다거나, 마왕을 물리친다거나 하는 등등..)
독자들에게 '비일상'으로 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행위라 하더라도,
그 동기가 '제비뽑기'가 되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모든 평범한 비일상들'이 특별하게 변신하는 느낌이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