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이상형

 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지겨운 야간 자율학습을 좀 재미있게 지내보고자 시도했던 놀이(?) 중 하나가 '내 마음 속의 히로인 순위' 작성이었습니다. 감상한 애니메이션, 플레이한 게임, 읽은 책 등에 등장하는 수많은 히로인들을 적어놓고 그녀들의 특징 및 매력포인트를 기술한 다음, 등급을 매겨서 순위를 결정짓는 방식이었죠. 캐릭터에 맞추어 계열도 나누어 보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상당한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재미있는 놀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츤데레 같은 용어를 몰랐으니 대충 누님, 여동생, 소꿉친구, 아가씨 등으로 분류했었죠)

 하지만 저기서 끝나면 재미없죠. 왜냐, 고등학교의 야간 자율학습은 무한대에 가까울만큼 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_-; 2~3일 걸려서 목록을 작성한 뒤에 또 심심해진 저는 보다 확장된 형태의 시도를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가 비슷한 맥락의 성우 순위 작성이었고, 두 번째는 매주 랭킹 재측정 방식을 도입한 것입니다.

 성우 순위는 당연히 좋아하는 성우들을 적어놓고 이유나 특징, 매력 포인트 등을 적어놓는 단순한 방식이었습니다. 허나 매주 랭킹 재측정 방식 쪽이 볼륨이 엄청났죠. 매주 10위까지의 순위를 재측정하면서,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할 경우에는 그 이유도 적어놓고 하는 등 일거리가 참 많이 늘어났거든요. 담임 선생님께 걸려서 어이없는 한숨이 섞인 질타를 들을 때까지 상당한 시간동안 저를 즐겁게 해줬습니다. (물론 걸리고 나서도 또 하긴 했는데, 다시 걸리면 공책을 빼앗길까봐 종이에 써서 스크랩하는 방식이라 정성이 좀 떨어지더라구요)


 이 즐거웠던 시기(?), 저의 마음을 휘어잡고 부동의 1위 행진을 한 것이 바로 성계 시리즈의 라피르 였습니다. 성계의 문장으로 처음 접한 이후, 그녀의 매력에 빠져버린 저는 책도 사고 정발이 안된 부분도 구해다보고 안 되는 일본어에도 드라마CD를 찾아서 듣는 등의 나날을 보냈죠. 아마 성계 관련 캐릭터 물품이 많았더라면, 용돈도 상당부분 거기에 쏟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라피르와 만나기 전까지 저의 이상형은 여중생, 여고생 & 소꿉친구 설정의 캐릭터였습니다. 이는 라피르를 만나기 전까지 '내 마음속의 히로인 순위' 비공식 1위를 달리던 아카리(in Toheart)의 영향이 컸죠. 이외에도 나데시코에서 루리를 좋아하고 러브히나에서 시노부를 좋아하며 게이트 키퍼즈에서 페이링을 좋아하는 등 굳이 따지자면 로리 캐릭터를 좋아하는 경향이 컸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를 한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라피르가 보여준 올곧은 심지와 당당한 모습, 순수한 마음 등에서 매력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무기없이 적과 만나도 아브리얼의 긍지를 버리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진트에게는 지상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다소 차갑게 들리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 사과할 줄 아는 솔직한 태도로 대하죠. 또한 환경 탓으로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 감성에도 불구하고, 그녀 나름의 최대한의 배려를 보여주는 모습 등이 정말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그런 태도가 잘 드러나는 대사는, 아직도 제 마음 한구석에서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그대는 전에, 자기가 죽은 다음에는 슬퍼해줄 사람이 없다는 얘길 했었지?", "응? 으응...",
 "내가 슬퍼할 거야. 그걸론 부족한가?"

 바스로일 격침 후, 퇴함을 하다가 폭발에 휘말린 진트를 구하기 위해 날아온 라피르의 대사. 언제 플라즈마로 산화할지 모르는 파괴된 배 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그녀의 모습은 단연 압권이었죠.

 그 때 이후 반 십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간 다음에는 상대적으로 예전보다 다양한 작품들을 접할 기회가 주어졌기에, 더욱 많은 히로인들과 만날 수 있었죠. 그렇지만 제 머리가 커져서인지, 아니면 외적인 부분까지 신경을 쓰게 되어서 그랬는지, 좀처럼 '내 마음속의 히로인' 1위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캐릭터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아만다 (in BLASSREITER)의 한 대사가, 또 한번 제 마음속을 울리게 해줬습니다.



 처음 아만다라는 캐릭터를 보았을 때, 솔직히 시즈카 누님이 연기하는 기운 센 여장수 캐릭터가 또 하나 늘어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많았습니다. 워낙에 그런 타입의 캐릭터를 많이 연기해 오셨으니까요. 하지만 마렉의 비극을 지켜보면서, XAT의 동료들을 떠나보내면서, 헤르만을 설득시키면서 '정말 강한 여성이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확실히 그녀에게 닥쳐오는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하기 그지없습니다. 살아온 마을이 파괴되고, 지키려고 노력한 가정마저 무너지며, 의지해온 동료들까지 그녀의 눈 앞에서 사라져 갔으니까요. 평범한 인간이라면, 아니 애니메이션 속의 캐릭터라고 하더라도 '폭주' 나 '실성' 이라는 상태이상에 빠져도 이상할 것이 없죠. 그러나 츠벨프에서 보여준 그녀의 대응은 너무나 침착했고 - 시도우와의 주먹다짐을 빼면 -, 이후의 행동은 모두 그녀의 강력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아브라는 종족적 특징과 배경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강력함 속의 상냥함'이라는 것이 라피르의 매력이라면, 아만다의 매력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단련되어 강해진 연약함'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트와 라피르의 모습을 보면서 BMG 스토리의 평범한 에피소드를 기대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아만다와 헤르만을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네요.

 확실히 사람의 취향과 끌리는 것은 조금 다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쿨한 캐릭터보다 모에한 캐릭터에 열광하는데, 이렇게 깊은 부분에 다가설 수 있는 타입이 정반대라는 것이 재미있는 것 같네요. 다른 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평상시의 취향과 가상의 이상형이 얼마나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말이지요.

by Laphyr | 2008/09/08 02:27 | = 애니메이션잡담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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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tmhr at 2008/09/08 07:57
아만다라는 캐릭터는 단지 히로인이 아니라 성장하는 여성히어로라고 보고싶습니다.

외형은 매력적인데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이나 동생에 대한 마음이 정말 대단하더군요...

저런 누나, 저런 동료를 두면 무척 듬직할것 같습니다.

물론 외형도 여성스러운데다 매력적이기까지하죠.
Commented by Laphyr at 2008/09/08 11:34
여성 히어로라... 정말 그렇네요.
초반에는 단순히 히로인이라고 치부했었는데, 말씀을 듣고보니 그렇게 표현하는 쪽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찾아보기 드문 타입인만큼, 더욱 그 매력이 와닿는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Commented by 악몽의현 at 2008/09/08 09:00
미안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응?!]
Commented by Laphyr at 2008/09/08 11:35
뭐 미안해 하실 것은 없죠..
현실에서 저런 사람을 찾겠다는 얘기도 아니니까, 굳이 현시창 문제가 나올 필요는...
Commented by 제목없음 at 2008/09/08 18:16
그런면이 있는 여성캐릭터들이 확실히 끌리죠. '픽션에서는'
Commented by Laphyr at 2008/09/09 00:30
저는 현실에서도 어떨지 모르겠어요.
아직 만나보지 않아서 환상이 깨지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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