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트릭스터스D


 저는 예전에 나름대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편이었습니다. 주로 아가사 크리스티나 코난 도일, 모리스 루블랑과 같은 네임드 작가분들의 유명한 작품들을 즐겨 읽었죠. 비슷한 취미를 즐기셨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집에 태동출판사의 뤼팽 전집을 사놓고 읽을 정도로 한 때 불타올랐던 장르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일본 애니메이션과 라이트노벨 쪽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게 되자 자연스레 위와 같은 장르에 대한 열정은 식어갔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좋아했던 장르는 말 그대로 '고전 네임드 작가'의 작품, 다시 말하면 신작이 나올래야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라이트노벨 중에서도 추리, 미스테리라는 소재와 결합된 형식을 취하는 작품은 상당히 많기는 합니다. 미스테리라는 분야가 워낙 '책을 읽으며 즐길 수 있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확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여러 라노베를 읽어가다보니 나름대로 옛 추리소설의 향기를 여기저기서 맡아볼 수 있었는데요..

 그 중에서 라이트노벨의 형식을 취하면서, 고전명작 추리소설의 냄새를 잘 재현한 작품도 있었고 반대로 한껏 라노베적인 요소를 주인공의 위치로 끌어다놓고 펼쳐나가는 작품도 있었죠. 트릭스터스는 바로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트릭스터스D는 1,2권이 끝난 시점에서 4개월 뒤, 학교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축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1,2권에서 독자의 뒤통수를 때렸던 도구들을 다시 사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1,2권을 제대로 읽은 독자라면 당연히 상정할 수 있는 배경이 있을 것이며, 작가는 뒤로 가면 갈수록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서 머리를 쓸 수밖에 없죠. D의 서장에는 그런 당연한 이야기가 너무나도 친절하게 적혀 있습니다. 서장을 읽던 당시엔 이것이 가장 큰 흉기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고전명작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명탐정, 혹은 범인들은 항상 신출귀몰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사건은 어디에서든 일어나며, 그것은 작가가 새로운 함정을 독자에게 선사함에 있어서 배경 선정이 매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죠.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나 라노베에서 볼 수 있는 일본식 추리소설은 조금 다릅니다. 제한된 환경의 주인공이 등장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무리가 생기며, 배경의 선정이 갈수록 어려워질 수밖에 없고, 결국은 엔딩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 이르죠. 이걸 가장 잘 보여준 예가 김모 소년이겠고요.

 코난이 시청자를 무시하는 다소의 억지 - 잠자는 거랑 기절해있는 것도 구별을 못한다니 말이 되냐?! 라는 의문으로 대표할 수 있겠죠 - 를 무릅쓰고 롱런을 선택했다면, 트릭스터스는 '마학'이라는 소재를 통한 환상의 구현으로 독자를 납득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마법을 추리소설에 등장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마법이라는 초현실적인 능력을 사용하면 '밀실살인'이나 '알리바이 트릭'과 같은 기초적인 요소들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으니까요. 물론 트릭스터스의 마법은 무척 제한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마법이 존재하는 이상 현실적인 추리가 들어맞지 않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겠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그 부분입니다. 마학,마법이라는 비일상 요소가 섞여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로서의 균형도 잘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죠. 

 L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D에서도 마법은 사건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개념을 소환하는 로제티의 사본, 영문을 알 수 없는 결계의 등장, 바깥과는 연락이 끊긴 밀실 상태의 건물- 이러한 요소들은 분명히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 심리묘사를 통해, 서술을 통해 마학에 관련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건들은 마도구의 힘을 빌린 기묘한 형태로 일어납니다만, 그 사건 자체의 의미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D의 또 하나의 매력은 이미나가 쓴 작품과 동명인 추리소설, <트릭스터스>와 <트릭스터스L>을 등장시키면서 독자와 등장인물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등장인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장면에서, 그 대상이 바로 소설 자체라는 상황을 매끄럽게 유도해내는 과정이 상당히 깔끔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동시에 1,2권을 읽고 서장을 읽은 독자들의 뒤통수에 점점 다가가는 방법으로도 사용되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1,2권과 마찬가지로, D에서도 가장 큰 수수께끼는 당연히 마지막에 해답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1,2권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더욱 재미있게 즐기실 수 있습니다' 라는 문구를 원망하고 싶을 정도로 결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라고 생각했더라도, '왜 그랬을까' 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부분이 역시 절정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다소 아쉬운 점은 크로울리와 관련된 메인 스토리의 진행 때문이었는지, 전편보다 여운을 느낄 수 있는 텍스트가 부족했다는 부분 정도일까요.

 일본 라노베/애니메이션 식 추리물의 약점은 메인 스토리라인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각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트릭의 농도가 옅어지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미 일본식 작품의 매력 - 상대적으로 뛰어난 캐릭터성, 인물간의 관계 등 - 에 빠져버린 독자는 메인 스토리에 취해 점점 그런 단점은 무시해버릴 가능성이 있는데, 작가가 그 완급조절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트릭스터스 역시 사쿄 시이나 교수와 아마노하라 아마네가 갖고 있는 배경과 비밀, 크로울리 3세의 이야기 등 여러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메인 스토리라인이 있는 만큼, 이후로 그것이 전개되면서도 지금까지와 같은 트릭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되네요.

 ps. 개인적으로는 276페이지의 일러스트 한 장 때문에라도 1,2,3권 중 D를 최고로 꼽고 싶습니다. 1,2권에 아름답고 귀여운 히로인들이 등장하면서 항상 궁금했던 것이니까요. 물론 얼굴까지 제대로 나와있지는 않습니다만, 타이트한 OZ의 제복을 입은 아마네의 실루엣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아름답더군요. ㅜ_ㅜ

by Laphyr | 2008/09/04 03:19 | = 라이트노벨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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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타즈 at 2008/09/04 07:49
D가 제목이 아니고 권 수 인가 보네요;
SS가 붙는 경우는 봤는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입니다.

...
그나저나 추리는 머리 아파서 안 보고 있으니 이것도 큰일이네요.
편식은 몸에 안좋은데 ㅠ_ㅠ
Commented by Laphyr at 2008/09/04 21:44
확실히 추리물 같은 것은 트릭이 밝혀지는 부분은 재미있지만,
그걸 생각하면서 봐야하니까 머리 아픈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런 특이한 제목 선정 방식은 처음 본 것 같아요.
Commented by 櫻くん at 2008/09/04 10:51
구매 목록엔 있지만, 구매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아직 못 사보고 있는 시리즈군요...

이런 귀중한 리뷰가 우선순위를 올리는데 한몫 한답니다... >_<;;;
Commented by Laphyr at 2008/09/04 21:45
하하; 히로인들도 여러가지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기 때문에,
대중적인 라노베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지간히 함께 즐길 수 있는 요소가
있는 작품인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ckatto at 2008/09/04 20:31
이런 귀중한 글이 비닐을 뜯는데 한몫 한답니다^^

덤으로 본문과는 관계가 없습니다만, 어째 Laphyr님 글이 초반에 비해 읽기 편해진것 같네요. 글의 양 자체는 변함이 없는데 말입니다. 제가 익숙해진건지 Laphyr님의 글솜씨가 늘어난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Commented by Laphyr at 2008/09/04 21:47
구매 순위에 이어 비닐의 압박;;

그런 생각이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저도 글을 써놓고도 나중에 보면 너무 딱딱한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요즘에는 '하고 싶은 얘기만 하기'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효과적으로 강조하기'를 해야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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