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쿠레나이 1권


 전파적 그녀의 독특한 매력과 아름다운 일러스트가 어우러진 작품이었습니다. 1권만 봐서는 완전한 본편이 진행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충분히 재미있는 요소들을 풀어놓은 서장이 아니었나 싶네요.

 1. 익숙하지만 다른 또 하나의 세계 - 배경

 일단은 글의 내용적인 측면으로 살펴본다면, 이미 쥬자와 베니카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통해 전파적 그녀의 세계와 같은 배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 외에도 오치바나, 키리시마, 엔도 등 익숙한 이름들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보면, 전파적 그녀를 읽으신 분이라면 감회가 새로울 것입니다. 이런 부분이 외전이나 후속작의 가장 큰 매력 중의 하나겠죠. 본편의 캐릭터들의 다른 모습, 혹은 미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글의 성격을 생각해보아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성을 유린하는 비행과 살인이 넘쳐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람까지도 팔아넘기는 상황이 비일비재한 전파적 그녀의 어두운 세계관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카타야마 켄타로 씨는 이러한 주변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서 신문이나 TV 뉴스 등을 객관적인 서술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데, 쿠레나이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세계라고해도 그것은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서 크게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에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럽게 돌아가는 세상의 온갖 비리를 역겹게 생각하는 깨끗한 소년 쥬자와 쥬우와 달리, 쿠레나이 신쿠로는 한발 물러난 시각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때문에 사건에 얽혀드는 장면도 다를 수 밖에 없고, 펼쳐지는 이야기의 느낌도 새로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쥬자와 쥬우라는 평범한 소년이 주인공이었던 전파적 그녀와는 달리, 쿠레나이 신쿠로는 어둠의 '해결사' 라는 캐릭터로 등장하기 때문에 앞으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는 공간 또한 상대적으로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평범한 고등학생의 시선을 좇아 맞닥뜨릴 수 있는 사건이란 한계가 있지만, 신쿠로는 평범하지 않으니까 말이죠.

 2. 풍부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히로인들 - 캐릭터

 신쿠로를 평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이 작품에서는 다소 황당한 암흑가의 배경 스토리가 펼쳐집니다. 마치 무협소설을 연상시키게 하는 여러 무가(武家)들의 등장이나, 음모론을 떠올리게되는 '거대 가문'의 존재는 약간은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용한 일상이 흘러가다가 갑자기 평범한 인간의 스펙을 뛰어넘는 인물들이 마구 튀어나오게 되거든요. 

 전파적 그녀에서도 얼굴을 보였던 사기 유닛 베니카를 비롯하여 유노 선배, 긴코, 타마키, 야미에, 야요이 등 주요 여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다는 설정을 갖고 있습니다. 유키히메의 이중인격을 제외하면 그래도 일상의 범주에 놓여있던 전파적 그녀에 비하면 파격적인 모습들이죠. 하지만 쿠레나이를 먼치킨 캐릭터 전투물로 전락시키지 않은 것은, 그 캐릭터들의 특성을 살려 잘 활용한 작가의 필력 덕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심에 히로인인 무라사키가 있습니다. 다른 여성 캐릭터들도 충분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읽는 사람에게까지 전해져 올 것 같은 투명한 마음을 갖고 있는 무라사키가 가장 빛나 보인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누가 정 히로인인지 헷갈리는 애매한 하렘물에 비해, 쿠레나이에서는 무라사키가 워낙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확실히 뿌리가 박혀 있다는 느낌입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둔한 신쿠로는 알아채지 못하는 유노 선배의 호감이나 긴코의 숨겨진 마음 등이 더욱 안타까우면서도 재미있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없는 농구 골대에 공을 던져넣는 것 보다는, 1:1 로 승부를 하는 쪽이 훨씬 더 긴장감 넘치고 여러 기술을 보여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상업적인 부분에서 마이너스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요소, 즉 독자를 한정지을 수 있는 행위는 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라사키가 매력적이고 정 히로인이라곤 하지만, 다른 여성 캐릭터들 또한 충분히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던져두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캐릭터 자체를 어떠한 한 속성 - 조신한 선배, 소꿉친구, 야한 누나 - 에 옭아매지 않고, 이 작품의 배경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변수를 함께 설정했다는 것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그만큼 스토리의 흐름에 충실히 따라가면서 여러가지 모습이 등장할 수 있다는 뜻이며, 결국 도태될 확률이 줄어들어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설정이 없더라도 소재는 풍부하게 주어진다는 얘기니까요. 

 3. 이질감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일본적인 느낌

 여러가지 매력적인 요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읽으면서 찜찜한 느낌을 깨끗이 정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쿠호인 가문의 비밀이 밝혀지는 부분에서는 애매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분명히 클라이막스이고 감동해야 할 순간이지만, 깨끗한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카타야마 켄타로 씨의 세계관은 라이트 노벨 작가로서는 상당히 염세주의적이며,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 또한 무서우리만치 현실적입니다. 다소 과장이다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에피소드를 통해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문장을 읽고 있자면, 고작해야 교육제도 비판, 잘해봤자 정치판 비판에 그치는 국산 라노베나 퓨전 판타지물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카타야마 켄타로 씨의 표현도 100%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클라이막스의 애매한 웃음 역시 그러한 문화적인 차이에서 느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라사키라는 소녀가 쿠호인을 뛰쳐나온 이유, 신쿠로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도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한 그녀의 궁극적인 갈등 요소가 작위적인 근친상간이라는 부분이 좀 애매했습니다. 클라이막스까지 달려가는 숨가쁜 전개력은 뛰어났지만, 기대한것 만큼의 의문 - 무라사키, 베니카의 기행 - 을 시원하게 해소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과거의 일본에서 여성이 갖고 있던 위치를 마음 속 깊이 이해하고 있는 일본인이라면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명한 오이치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일본의 여성은 소유물처럼 취급받는 시절이 있었으며, 그런 이야기를 좀 더 생생히 접해온 일본인이라면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쿠호인 집안의 비밀을 따끔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철저한 유교적 예의범절 - 속은 어찌되었든 겉으로는 - 의 사회를 20년동안 교육받아온 입장에서는 실감이 나질 않더군요.

 어쨌든 근원이 된 갈등은 1권에서 일단 매듭을 지었고, 이런저런 실마리가 많이 남아있는 상황이라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소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늘어놓긴 했지만, 읽는 도중에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정도로 무서운 흡입력을 가진 작품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네요. 

by Laphyr | 2008/03/20 21:31 | = 라이트노벨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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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살인귀 at 2008/03/20 21:35
제 기억으로는 전파적 그녀와 3년정도의 시간차가 있는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아마 전파적그녀쪽이 3년후의 스토리가 아닐까 생각.
Commented by 핌군 at 2008/03/20 22:39
재미있나보군...다음달에 지를까나 (...)
Commented by ckatto at 2008/03/22 02:39
밝은 부분이랄까 판타지(라기보다는 망상)에 가까운 라노베가 많은걸 생각하면 적절한 균형을 잡고 있지 않나 싶네요.
Commented by 사화린 at 2008/03/22 06:44
아무래도 그런 문화적 차이가
감상하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죠 -_-ㅋ

이번과같은 사상적 측면이 장애가 될수도 있고,
간단하게는, 말투 차이(원서 -> 번역서)로 인해서
전혀 캐릭터에 대한 느낌을 다르게 받을수도 있고말이죠... ;ㅁ;


야마모토씨의 일러스트는 특이한 매력이 있어서,
그 일러스트만으로 이미 작품의 색깔을 정한다는 느낌까지 드는 것 같습니다.

9S에서 워낙에 강한 인상을 받아서 그런걸까요.. -0-;;


아무래도, 표지 일러스트에 나온 캐릭터가 무라사키겠죠? @_@
어떤 캐릭터이길래 그리 비중이 높고 매력이 있는지 보고싶습니다 /ㅁ/

전파적그녀도 봐야하는데.. OTL
사다놓고 읽지도않은..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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