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노벨 독자가 보는 <인사동 스캔들>의 문제점

 얼마 전 케이블 채널에서 <인사동 스캔들>을 봤습니다. 2009년 4월 개봉작임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부터 케이블에서 번갈아가며 몇 군데에서 틀어주던데, 이번에는 처음부터 한 번 감상할까 싶어서 보게 되었네요. 올해 개봉작인데 벌써 케이블에 나왔다는 걸 보면 어떤 성적을 거두었는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명명백백이지만, 그냥 그렇게 보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좀 다르게 감상해 봤습니다. 라노베 독자분들 중에서도 영화를 감상한 적이 있다면, 혹은 영화만 보셨더라도 이러한 감상 방법은 어떨까 싶은 분들은 한 번 기억을 되살리며 읽어보시면 좋겠네요.


1. 주제의 문제

이 영화의 주제는 국보급 그림의 '복원'에 관련된 미술계의 에피소드 입니다. 말을 더 붙일 필요도 없이, 상대적으로 생소한 네타라는 것이 첫번째 문제입니다. 물론 생소한 주제를 훌륭하게 소화해 낸다면 그 무엇보다 신선한 명작이 탄생할 수도 있지만, 그게 쉽다면 획일적인 b~c급 영화들이 양산되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았겠죠.

사실 이것은 굉장히 노력을 한 시도였습니다. 라이트노벨 역시 이능 배틀물이나 학원 러브 코미디 등의 전형적인 장르의 작품이 최근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습니다만, 음악을 접목시킨 <안녕 피아노 소나타>라든지 책과 관련된 신비한 이야기를 다룬 <문학소녀 시리즈> 등의 작품들도 등장하면서 인지도를 얻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도를 달리는 작품들이 많은 것은, 그것이 그만큼 위험 부담이 적고 일정 숫자 이상의 안전 부수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왕도와 차별화되는 무언가를 도입하는 것은 확실히 내세울 것이 없다면 불가능하겠죠. 거기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작가의 네임벨류나 작품 자체의 뛰어난 화제성입니다.

<인사동 스캔들>은 여기서 작가의 네임벨류에 해당하는 '배우의 이름값'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엄정화와 김래원이라는 배우를 각각의 이미지에 최적합한 형태로 등장시켰고, 그것은 실제로 이 영화의 광고가 나가는 시점에서 어느 정도는 홍보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죠.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내용입니다. 훌륭한 작품이 묻히지 않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동원하는 것과, 허접한 작품이 겉만 번지르르하게 포장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구분하기 힘들거든요. 이 작품은 포장에는 성공했지만, 미술계 이야기와 복원이라고 하는 생소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한껏 폼은 잡았지만요. 라이트노벨로 치자면 산악부 소설을 쓰면서 K2에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등정의 준비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가 등을 멋지게 늘어 놓았지만 정작 엔딩은 별 볼 일이 없는 꼴이랄까요? 무언가 기대를 했을 터인데, 그것에 보답하는 신선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2. 캐릭터의 타입 문제

사실 라이트노벨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캐릭터라고들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이래서 망했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한 것도, 라노베와 연관시킨 망한 이유를 한 번 작성해 보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 부분 때문이었죠. 

라이트노벨에는 정말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너무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다보니 겹치는 애들도 많고, 다른 작품이지만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경우도 생깁니다. 왕도 장르를 싫어하는 독자들은 이 부분을 굉장히 심각하게 지적하지만, 그러한 장르를 즐기는 독자들은 자신의 취향인 특정 유형의 캐릭터 - 예를 들자면 로리 츤데레 - 가 나온다면 어지간해서는 그 작품을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쉽사리 선택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왕도 장르를 쓰는 작가라고 해도, 츤데레 캐릭터를 10명 등장시키는 바보 멍청이는 없습니다. 학원 러브 코미디 장르의 작품을 읽는데,

히로인 : "벼, 별로 너를 깨우러 오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니까!!"
여동생 : "오, 오빠를 걱정해서 책가방 챙겨 주는 건 아니란 말이야!"
누나 : "뭐, 안 먹어도 상관은 없지만, 일단은 누나니까 잊어먹은 도시락 전해줄께."
전학생 : "구, 굳이 네 옆자리에 앉고 싶지는 않지만, 그 자리가 좋아 보인다구!"
남학생 : "너, 너랑 게임을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 게임은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이런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얼마나 재미가 없겠습니까? (......아니 그런데 이렇게 써 놓고 보니까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물론 다른 방향의 재미입니다) 근데 인사동 스캔들은 그렇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다들 잘났습니다. 김래원은 언제나처럼 특유의 폼 잡기 스킬을 시전하며 틱틱 거리는 대사를 내뱉는데, 문제는 엄정화나 김래원의 동료 (남자 둘 여자 하나), 심지어는 그를 의심하며 쫓는 여경찰이나 조연 임하룡마저 그런 똑같은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얘네들이 대화를 하면 서로 갖은 폼을 다 재 가면서 툭툭 한 마디씩, 그러니까 "아니, 요즘은 그런 식으로 장사하나?" , "왜, 그렇게 나오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았나?", "뭐 일단은 협조나 좀 해 주시죠?" 같은 식으로 X가지 없는 말투로 단방향식 내뱉기가 진행되죠. 그런 캐릭터가 한 명이라면 모르겠지만, 등장인물이 전부 다 그런 모양새니까 전혀 개성이 될 수도 없습니다. 


3. 캐릭터의 매력 부족  

백 번 양보해서 생각하면, 아무리 츤데레 캐릭터가 10명이라도 각각의 히로인들이 모두 아름답고 예쁘다면 인정을 해 줄수도 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한 만 번쯤 양보하면요. 그런데 이 인사동 스캔들의 문제는, 그렇게 비슷한 캐릭터 유형만을 등장시키고 있는 주제에 그 매력조차 부족하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는 배우들의 연기력 부족이나 어색한 대사들도 한 몫을 했죠.

그나마 이 영화의 가장 큰 축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악녀 엄정화 입니다. 그녀는 비리와 어둠의 근원으로 타도해야 할 악녀로 묘사되고 있고, 그녀가 보여주는 연기 자체도 사실 썩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보여주는 타락한 행위의 방법들이 너무나도 덜 자극적이었고,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요즘의 라노베에서는 단순한 권선징악 구도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슬레이어즈나 풀메탈패닉 시절에만 해도 작품의 인기를 위해서 매력적인 악역이 등장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레죠나 피브리조, 제로스(얘는 좀 애매하지만) 같은 마족들이 보여주던 포스라든지, 가우른이 보여주던 잔혹함을 보면 그들을 꼭 타도해야 겠다는 심리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엄정화가 연기하는 악녀는 분명히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국가나 보험회사를 상대로 사기극도 벌이고 남의 손가락도 자르고 합니다만, 영화는 그것을 굉장한 악행인 것처럼 표현해 내질 못하고 있습니다. 주객전도라고나 할까요? 어째서 그러한 장면이 등장할 필요가 있는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현실에 가깝게 묘사한 나머지 '아, 저럴 수도 있구나' 하고 납득해 버릴 정도의 안일함을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가우른이 실제로는 여든 살 노모가 인질로 잡혔기 때문에 그런 악행들을 저질렀다, 는 식의 에피소드가 등장했다면 FMP의 대립 구도가 그토록 살벌할 수 있었을까요.

나머지 캐릭터들은 2번 항목에서 말한 것 때문에 다 개성을 말아먹고 있어서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고, 따로 이야기하자면 김래원을 따라 다니는 여형사 정도가 되겠습니다. 홍모양이 연기한 이 여형사는 이전 사건에서도 김래원과 연관이 있는, 굳이 따지자면 소꿉친구(좀 많이 다르지만-_-;;) 격인 캐릭터입니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그의 과거와 접점이 있는 유일한 캐릭터거든요. 헌데 이것을 이용해서 무언가 이야기를 전개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냥 그녀 역시 어색한 연기력과 함께 김래원 비슷한 폼 잡기를 계속 해 가면서 삐딱하게 '그냥 잡어!' 라는 생각만 하는 머리 빈 열혈녀 그 이상도 이하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녀의 행동에는 주관이 없고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사 자체도 어색하기만 하고, 그쪽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봐주기 안쓰럽더군요.

결국 엄정화의 악녀 캐릭터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나머지, 굉장히 통쾌하여야 할 엔딩 장면은 싸가지 없는 김래원이 불쌍한 아줌마를 괴롭히는 모습으로까지 비춰질 정도입니다. 간달프가 수몰된 아이센가드에서 사루만을 불러 내 따질 때의 통쾌함은 그가 당한 감금의 굴욕이 있기 때문이었고, 항상 보여주는 카미조 씨의 열혈 이매진 브레이킹이 통쾌한 까닭은 그가 그만큼 얻어 터졌기 때문입니다. 감독께서는 이야기 전달에만 신경을 쓰시느라 아무래도 관객이 받아들일 흐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하신 것이 아닐까요. 라이트노벨에서도 그런 작품이 굉장히 많으니까요. 자기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을 멋지게 전달하고 싶어서, 독자의 요구에는 전혀 부응하지 못하는 아쉬운 작품들이 말이죠. 그러한 작가나 작품이 일반적으로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겠죠?


* 영화 밸리에는 그냥 안 보내야겠네요. 괜히 이상한 놈이 이상한 기준으로 주절댔다고 이상한 소리 듣기도 싫고.. 뭐 어차피 라이트노벨을 보시는 분들이 읽기에만 좀 재미가 있을까 싶은 글이라..

by Laphyr | 2009/11/30 03:15 | = 애니메이션잡담 | 트랙백 | 덧글(1)

망할 하드 ㅜㅜ

파워를 교체하는 도중에 하드가 깨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도 두 개 중에서 하필 일이나 공부 관련 자료가 많았던 C,D드라이브가 ^^^

하룻동안 컴을 못하니 근질근질한 건 둘째치고, 이건 뭐 즐겨찾기 손상 등 충격이 너무 심하네요.
모아둔 이런저런 자료들도 다 날아가고.... 이걸 언제 복구할 수 있으려나? ㅎㅎㅎㅎ

ㅜㅜㅜㅜㅜㅜ

by Laphyr | 2009/11/26 21:14 | = 경교대 생활일지 | 트랙백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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